잡설 "안분지족"

by 파르티잔


고등학교 시절, 국어 시간에 배운 단어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단어는 이양하의 수필 나무에서 나오는 #안분지족 이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분수를 알고 넘치는 욕심을 내지 않으며, 처한 상황에 만족하며 살아간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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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 이양하


나무는 덕(德)을 가졌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分數)에 만족할 줄을 안다. 나무로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가를 말하지 아니한다. 등성이에 서면 햇살이따사로울까, 골짜기에 내려서면 물이 좋을까 하여, 새로운 자리를 엿보는 일도 없다. 물과 흙과 태양의 아들로 물과 흙과 태양이 주는 대로 받고, 후박(厚薄)과 불만족(不滿足)을 말하지 아니한다. 이웃 친구의 처지에 눈떠보는 일도 없다. 소나무는 진달래를 내려다보되 깔보는 일이 없고, 진달래는 소나무를 우러러보되 부러워하는 일이 없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스스로 족하고, 진달래는 진달래대로 스스로 족하다.]


고등학생이 좋아하기에는 너무 나태해 보이는 문구였지만, 나는 그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적당히 하는 것'. 그래서였을까.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공부를 적당히 했다. 굳이 대단한 것이 있다고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공부보다는 운동을 더 좋아했다.


3교시가 끝나면 도시락을 먹고, 점심시간이 되면 체육관으로 향했다. 늘 함께 가던 친구들과 배구를 하거나 헬스 기구들을 만지작거렸다. 그것마저 싫증이 나면 운동장 철봉에 매달렸다. 나는 특히 평행봉을 좋아했다. 요즘 '딥스'라고 하는 운동인데, 어깨가 뻐근해지는 느낌이 좋아서 매번 했던 기억이 난다. 처음에는 2~3개 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매년 꾸준히 하다 보니 3학년이 되어서는 한 번에 40~50개를 해도 기운이 넘쳤다.


15년 전 중고 장터에서 턱걸이와 평행봉이 가능한 묵직한 운동 기구를 구입했다. 횟수를 늘려가다 결국 '테니스 엘보'를 얻고 말았다. 내 몸은 이미 고등학생의 몸이 아니었다. 안분지족하지 못했다. 적당히 했어야 했다. 좋아하는 단어는 안분지족이었지만, 전혀 그렇지 못했다.


내가 다니던 남성고등학교 체육관은 꽤 컸는데, 배구 선수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위해 운동 기구가 많았고, 특히 배구공이 많았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몰두했던 운동은 배구와 헬스,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 하던 팔 굽혀 펴기와 윗몸일으키기 같은 맨몸 운동이었다.


당시 500원에 구매한 무술 책에는 체력을 높이는 방법으로 한 발로 하는 스쿼트(일명 '피스톨')와 한 손 팔 굽혀 펴기, 두 엄지와 검지만을 이용한 팔 굽혀 펴기 같은 동작들이 소개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해보려고 노력했고, 결국 한 손 팔 굽혀 펴기나 피스톨 스쾃를 여러 개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하나 정도는 가능할 것 같지만, 시도하다가는 부상당할 것 같다. 배구 도 꽤 잘했지만 씨름을 하다가 오른쪽 어깨를 다친 후로는 배구를 하지 못했다. 지금도 그때 부상으로 공을 던지는 동작이 어렵다. 이 또한 안분지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승부에 대한 집착이 강했고, 지고 난 뒤 찾아오는 열패감이 싫었기 때문일 것이다.


좋아하는 단어와 삶은 이렇게 달랐다. 내가 유일하게 그 단어처럼 행동했던 때는 적당히 공부하고 마지막 순간에 적당히 안주했을 때뿐이다.


요즘 강도 높은 달리기 훈련을 할 때면, 몸이 알아서 안분지족한다. 한 번 더 강하게 뛰기 전에 적당히 멈춘다. 젊은 시절이라면 더 강하게 했을 테지만, 이제는 알아서 적당한 선에서 만족한다. 그 단어가 이제서야 비로소 삶의 일부가 된 것이다.


얼마 전 유명 강사분에게서 100세 시대이니 자기 나이에서 20을 빼고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생각해도 어렸을 때의 60대와 지금의 60대는 적어도 10년에서 15년은 차이가 나는 것 같다. 그런 나도 30대인데.


그런데 또 어떤 과학자는 우리의 얼굴은 과거보다 젊어졌을지 몰라도, 인간은 구석기시대 이후로 하나도 발전한 것이 없다고 한다. 그때의 인류나 지금의 인류나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어디에 맞춰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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