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갈 수 없지
저번 판교 여행(여행 맞음)이 꽤나 즐거웠는지 요즘 서울 근교에 관심이 많아졌다. 버스 지하철도 좋은데 아예 덜컹거리는 기차여행도 끌린다. 나에게 모든 여행은 휴식보단 모험에 가깝다. 별거 아닌 이동이라도 조금씩 리스크를 지어야한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여행이 필요하단 건 불안한 여정이라도 리프레쉬가 필요하단 뜻일까? 딱히 기계처럼 일만 하는 요즘이 아닌데. 오히려 평소보다 더 놀고 먹었다. 지난 주엔 술자리가 두 개나 있었는데 어제도 음주, 오늘도 가족들과 먹고 마시며 풍류를 즐겼다. 그래서 그런 걸까? 잠도 그렇고 노는 것도 하면 할 수록 더 느니까.
여행보다 소풍이란 단어를 쓰면 어떨까? 뭐든지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해야 실제로 이뤄질 수 있으니. 지속될 수 있는 계획인지도 중요하다. <몸짱이 되어서 다 패버리고 다니기>를 목표로 하면 피티 요금이나 닭가슴살 구경만 하다가 끝날 수도 있는 거다. 그러니까 그런 걸 원앤온리 목표로 하기보단 좀더 끌어내린 잔챙이들을 생각해두는게 좋을거같다. 뭐가 있을까? 나는 요즘 밤산책을 한다. 허리를 펴고 조금 빨리 걷는 것만으로도 자기 관리왕처럼 보일 수 있단 건 좋은 일이다. 물론 오늘은 안했다. 대신 실내운동을 할 것이다. 간지나게 숨쉬기.
가벼운 마음으로 소풍을 떠나고 싶다!
아무리 가벼운 마음이라도 가방은 챙겨야 한다. 왜냐면 사실 짐 챙기는 순간이 제일 행복하니까. 기차를 타고 창가자리에 앉고 싶다. 풍경을 보고 싶으니까. 전에도 말했지만 난 지리적 경험치가 0에 수렴하기 때문에 어딘가로 이동 중일 땐 그걸 실시간으로 체험해야 한다. 그래야 제 기분이 조크든요. 역에 내린 후 다양한 곳을 가고 싶다. 물론 세 곳 이상은 안된다 나는 체력이 안되니까. 카페투어 같은 것도 좋을 것 같다. 근데 항상 궁금했던게 카페투어를 즐기는 멋쟁이들은 하루에 세네군데 도는 걸까? 아님 그냥 두 곳 정도 들리면서 느끼는 자기 효용감을 지칭하는 단어가 저 카페투어라는 것일까? 암튼 책도 읽고 일기도 쓰고 메모도 끄적이면서 낯선 풍경을 구경할테다. 눈 앞에 올리브영이나 다이소 같은 게 보이면 좀 짜게 식을 것 같다. 그런 것들은 집 앞에도 있기 때문이다. 아예 100층 높이에서 그걸 내려다본다면 제법 경이롭긴 하겠다.
돌아오는 길도 평소의 귀가길과는 달랐으면. 보통의 나는 성수동 다녀오는 것도 힘들다. 책 일곱 권과 함께한 길이었다고 변명하려 했지만... 구차해지니 그만두겠다. (근데 이미 말함)(그래서 구차해짐) 구차해지지 않으려면, 그러니까 귀가길 체력을 사수하려면 약간 아쉬울 때 그 곳을 떠나야 한다. 집 가는 길이 막막하기보단 또 다른 소풍처럼 느껴졌으면. 나는 서울 온 관광객들을 볼 때마다 정말 진심으로 부럽다. 보통 여행은 돈 싸들고 오는건데 서울은 돈만 있으면 최고 행복한 도시 아닌가..? 하지만 이런 못되고 냉소적인 마음보다는 그냥 이 지겨운 거리와 시끄러운 도시와 지저분한 거리와 비둘기와 비둘기와 또 다른 비둘기들과 매일매일, 어떻게든 새롭게 인사할 방법을 연구해야겠지. (아 따위로 말하고 있지만 나는 서울을 꽤 좋아한다) 돌아오는 길에 지쳐 잠들지 않아야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거다. 그래서 소풍길 체력은 정말 중요한 것이다...
사실 몇 달 전주터 파리 생각이 많이 난다. 몇 년 전 나는 필요 이상으로 비장하고 조급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나름의 낭만이 있었다. 그 때 들렸던 곳에서 보름, 아니 일주일이라도 머물고 싶다. 예전엔 삼박 사일 휴가를 내고 유럽여행을 다녀온다는 직장인들이 이해가지 않았다. 그럴 바엔 제주도를 가지 뭐냐며 버릇없이 비웃기만 했다. 하지만 쳐웃다가 그게 내 얘기란걸 알게 되었을 때. 난 이미 아흔여섯의 수염 덥부룩한 직장인이 되어있던 것이다. 일 년에 15일의 연차를 아끼고 아껴 써야하는. 그러니 삼박사일의 유럽 여행은 사실 나의 이야기도 될 수 없는 것이다. 평일 삼박사일 휴가를 내기에 나는 간이 아직 콩알만하다.
그래서 누군가의 그 유럽여행은, 따질 것도 없이 그냥 부럽기만한. 그런 이야기가 되었다. 유럽 어디에 숨겨둔 아들딸이 있지 않고서야 당장은 갈 수 없다. 이래서 어릴 때부터 연애를 많이 해야한다고 했던 걸까? 하늘을 봐야 별을 따니까? 역시 옛 사람들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다. 성현들의 지혜를 헤아리며 오늘은 캐리어 싸는 꿈을 꿔야지.
* 지난 21년 7월 개인 블로그에 적인 글을 옮겨 적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