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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글이 Oct 21. 2023

#12 '우울증 치료 일지' 11회차.

11회차. 잠과의 전쟁

절대 이기지 못할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겪고 있다.

이건 무조건 내가 지는 싸움이다.

싸움을 거는 쪽도 나이고, 싸움을 받아내는 쪽도 나다.

그 결과 나는 지금 자포자기 상태다.


기분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게 과연 좋은 일인 걸까?

별다른 반응은 없으니 평화롭다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처음으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그건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감정도 없고, 아무 생각이 없다.

식단을 조절해 볼 생각도 없고,

씻으려는 생각도 없다.

그저 잠에 취해 하루하루가 통째로 사라진다.

그러다 아주 가끔씩 

슬픔이 확 올라와서는 눈물이 나려고 하는 상태가 반복된다.

하지만 눈물은 나의 마지막 자존심이라는 마음 하나로

꾹 참아내고 있다. 단 한 방울도 쉽게 흘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 남은 의지로 얼른 감정을 추스른다.


약을 먹을 때면 그제야 정상적으로 사고를 할 수 있게 되는데

그때만 되면 마음이 굉장히 허탈하다. 

내가 왜 이렇게 약을 먹고 있지?

내가 왜 이렇게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 

다시금 나를 채찍질하지만 나에게 남아 있는 시간은 없다.

'잠'을 계속 자야 하니 말이다.


늘 새벽 너머 아무 시간대나 자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백수인 나에겐 다음날 아침 출근을 걱정해야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규칙적인 생활이라는 것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나타난 패턴은 좀 다르다.


새벽에 잠을 자서 아침 8시에 기상.

밥을 먹고 또 바로 잠이 든다.

그러고 오후 2시에 기상.

점심을 먹고 또 잠이 든다.

그러고 오후 6시에 기상.

저녁을 먹고 남은 짧은 하루를 보낸다.

하루 일과가 먹고 자는 일 빼고는 아무 일이 없다.

어떠한 영문인지 밥을 먹으면 곧바로 잠이 쏟아져서 

아무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하루에 14시간 ~ 15시간을 자고 있는 셈이다.


잠을 자는 시간도 문제지만 마음이 불편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자려고 하면 마음이 너무너무 슬펐다.

새벽에 뒤척이는 시간이 길었고,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옛날에는 '내가 죽으면 어떡하지.', '내가 눈을 못 뜨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이 심했는데

이제는 '아... 이렇게 나 곧 죽을 것 같아.', '조만간 내가 죽겠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

내 앞에 죽음이 드리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모든 것이 다 공포스럽다.

그 와중에 든 또 다른 생각은 '내가 이렇게 살고 싶은 사람이었나?' 하는 점이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계속 그 공포에 갇혀 있는 모습을 보자니

꼭 살고 싶어 소리치는 사람이 연상됐다.

나의 진짜 마음은 무엇일까.


쏟아지는 잠과 함께 나타난 다른 증상은 바로 손 떨림.

밥을 같이 먹는 사람들은 무조건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손 떨림이 심해서 가족들의 걱정을 산다.

담배도 술도 마약도 어느 것 하나 할 줄 아는 것이 없는데도

꼭 무엇에 중독된 사람 마냥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 제가 볼 때는 기분이 아무렇지 않다 하지만 어마어마하게 감정 기복이 있는 것 같은데요?

- 그런가요? 그럼 의욕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의지가 없다고 해야 할까요.

-> 의욕은 줄고, 본인이 원치 않는 감정이 파도처럼 감정기복을 보이는데

-> 지금 너무 들쑥날쑥하네요. 잠도 기분의 증상 때문인 것 같아요.

-> 다시 일주일 단위로 약을 먹어 볼게요. 조절이 안되니까.

- 너무 불안해요. 지금 저는 뭘 해야 하나요?

-> 지금은 뭘 해서 좋을 시기가 아니에요. 

-> 본인 생각이나 감정이 의지대로 조절이 안되고 있어요.

->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게 일단 제일 좋죠.

- 커피를 마셔서라도 잠을 이겨내는 게 좋을까요?

-> 아니요. 억지로 그렇게 버틸 필요는 없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니...

좌절하기도 잠시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은 

내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의지가 없는 것이 아니라 조절이 안 되는 거였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게 슬프지만

이번에는 정말 약의 힘을 빌려 보기로 했다.

약을 꾸준히 먹고 정상 범위로 돌려놓으면 되는 일이다.

쏟아지는 낮잠까지 사랑할 것. 나를 미워하지 말 것.

몸에 맞지도 않는 커피를 마시며 버텨야 하나 고민했는데

너무 잠이 오면 그냥 자도 된다는 말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눈꺼풀이라 했거늘.

눈꺼풀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는 나는 바보다.


11회차. 잠과의 전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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