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회차. 맞는 약 찾기 2
매번 오후 늦게나 돼서야 무거운 몸을 이끌고 병원에 갔다.
아침에 일찍 가면 좀 덜 기다렸다 오래 진료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아침 진료를 받으러 가 봤다.
결과는 대. 실. 패.
사람이 진짜 진짜 진짜 많다.
알고 보니 아침에 병원 문을 열 때부터 시작해서 11시까지는
사람들이 계속 몰려 엄청나게 바쁜 시간대라고 한다.
오후 시간도 마찬가지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 진료가 시작되는 시간부터 4시까지는
또 사람들이 몰려 한창 바쁜 시간이라고 하니...
나는 언제나 그나마 덜 바쁜 오후 시간에 잘 맞춰 오고 있었던 것이다.
빨리 가면 빨리 볼 줄 알았는데 이렇게 사람이 많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자리에 빽빽하게 앉아 있었다.
왜 이렇게 아픈 사람들이 많은 지 슬픈 광경이다.
병원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동안 질문 거리를 생각하기도 하고,
준비해 간 질문들을 수정하기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곤 하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건 상관없는데 사람이 많으면 아무래도 진료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짧아지니까.
그게 너무 아쉬워서 시간대를 바꿔 본 것인데 실패했다.
아침 일찍 일어난 새가 피곤하다고 했던가
바쁜 병원 풍경에 꽤 피곤한 기다림이 계속 됐다.
진료를 마치고 집에 가면 약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찾아보고 기록해 둔다.
우울증, 강박증 치료제라는 단어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졌고,
충격의 정도가 0이라고 본다면.
조현병 약을 처방받았을 때 50 정도의 충격을 받은 것 같다.
그때의 충격으로 너무 놀란 나머지 혼자 감당하기 버거워
엄마에게 병원에 다닌다는 사실을, 이런 약을 먹게 된 사실을 털어놓기도 했었다.
지난번 진료 후에 나는 '정신분열증' 약을 처방받았다.
충격의 강도는 100 어쩌면 그 이상.
내가 정말 사회에 위협을 가할지도 모르는 환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평소에 인생을 살면서 생각이 많다. 생각이 깊다. 생각의 차원이 다르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 대단하다. 이런 긍정적인 얘기만 들어왔던 나다.
그런 상상력이 나를 공격해 병들게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행히 충격을 받음과 동시에 이제는 더 이상 무너질 곳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좀 바짝 차리고 살 필요가 있겠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
내가 왜 이런 약까지 먹어야 하지?
얼른 제자리로 돌아가고 싶었다.
거부감이 가장 심한 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에 빠르게 안정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또 한 번 먹먹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생각이 줄었다.
생각을 멈추는 법을 알았다고 해야 할까?
안 좋은 어떤 생각이 떠오르려고 하면 아아아 생각하지 말자. 이렇게 된다. 이게 된다.
물론 스치듯 그런 생각이 떠오르긴 했지만 더 이상 슬픔의 구렁텅이로 이어지진 않는 것이다.
자주 드는 생각은 가족들의 장례식장에서 내가 울고 있다거나,
사고가 났다는 연락을 받는 장면, 어디선가 울고 있는 장면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는데
그럴 때마다 에잇 생각하지 말자. 그만. 그만. 생각을 휘저을 수 있는 힘이 생겨 도움이 많이 됐다.
-> 생각을 조절하려고 쓴 약이니까 그럼 약이 잘 작용한 건 맞아요.
- 이름에 비해서 약이 잘 맞았다니 참 슬펐어요.
-> 우리가 정신과에서 약을 줄 때는 약 이름을 안 알려주잖아요.
-> 약국에서는 무슨 약인지 상세하게 분류해 주고 복약 상담료를 받으니까
-> 그렇게 해야 되는 거지만 저희는 굳이 일부러 이 약을 다 일일이 설명을 안 드려요.
-> 환자를 진료해 본 전문적인 경험이 많다 보면 조현병 약이나 이런 약을 소량으로 쓰면
-> 강박증이나 심한 우울증, 심한 불안증에 생각을 조절할 수 있는 힘이 조금 커진다.
-> 조현병 치료제이지만 조현병이라서 꼭 쓰는 건 아니고 우울증에도 쓸 수 있게 돼 있거든요.
-> 절대 약으로 진단을 거꾸로 올라가진 않아요.
-> 제 전문적인 소견으로 이 약을 선택하는 거기 때문에 그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내가 그런 생각을 조금 했다고 해서 금방 정신분열증이 왔을 리 없다.
정신분열증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그 보다 몇 배의 약을 투여해야 한다고 했다.
물어보길 잘했다. 겁이 나기도 했었는데 이렇게 물어보고 나니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약에 대한 거부감도 줄어들게 돼 다행이다.
지난주에는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갔고, 코로나 19 검사를 했다.
다행히 음성이 나왔고, 병명은 역류성 식도염.
먹고 계신 약이 있냐고 물어보는데 순간 너무 당황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되려 무슨 약을...? 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혈압약과 당뇨약 이야기를 꺼내시길래 없다고 했다.
매일 드시고 계신 약이 있냐고 물었는데... 없다고 했다.
-> 그럴 땐 정신과에서 항우울제 성분의 약을 먹고 있다고 얘기하면 돼요.
-> 웬만하면 얘기해 주면 좋죠. 거기 선생님도 판단하기 수월하니까.
다른 선생님들은 내가 그런 얘기를 꺼냈을 때 뭐라고 답을 하실까?
그럼 신경 안정제는 빼도 되겠네요.라고 말씀하실까?
그래서 신경성 식도염이 생겼을 수 있겠네요.라고 말씀하실까?
선생님이 좋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데 도움이 되기 위함이라고 하니
어쩐지 꼭 말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다음엔 자연스럽게 말을 꺼내 볼 수 있길 바라며 도전해 봐야겠다.
13회차. 맞는 약 찾기 2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