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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글이 Oct 21. 2023

#23 '우울증 치료 일지' 22회차.

22회차. 한 걸음, 두 걸음

아주 오랜만에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했다.

부스스한 모습이 어쩐지 더 불쌍해 보이기도 하고 생기 없어 보이는 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기분 전환도 할 겸 머리를 자르고 매직을 했다.

곧게 뻗은 머리만큼 생각도 마음도 조금은 정리된 듯한 느낌이다.

몇 시간을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는 작업이 힘들긴 했지만 

오랜만에 시도한 스타일 변화는 생각보다 큰 분위기 전환을 가져다줬다. 하길 잘했다.

옛날에는 항상 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머리를 한 후 확실히 모자를 덜 쓰고 다닌다.

나갈 때는 머리를 감기도 하고, 괜찮은 날에는 그냥 자연스럽게 나가곤 한다.

병원에 갈 때도 마찬가지다. 꽤 좋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지난 2주 동안은 조금 바빴다.

졸업 후 손을 놓고 있던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공부를 한다는 건 결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감에 즐겁지만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지금 하는 공부는 이전에 해오던 공부랑은 조금 다른 느낌이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의 공부만 골라서 할 수 있고, 시험은 언제든 다시 칠 수 있으니

확실히 부담감이 적다. 그리고 약간의 스트레스가 동력이 되어 나를 움직이게 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고, 감사한 일이다.

이전부터 배워보고 싶었던 심리학 강의나 책을 통해 혼자만의 공부를 이어나갔다.

사실 공부라고 할 것도 없었지만 학습의 개념으로 마주하니 공부가 되었다.

답답한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기도 했고, 오랜만에 공부를 하다 보니 

뭔가 환기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해야 할 일이 있으니 하루 종일 바빴다.

최소한 공부를 하느라 집중한 시간 동안에는 잠시동안 우울함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공부를 하지 않고 있는 시간에는 너무 우울했다.

살이 쪄서 우울하다거나, 죽을까 봐 우울하다는 개념이 아니라 

그냥 너무 우울했다.

우울한 값이 기본인 상태로 있었고, 무섭고 슬프고 공허한 감정이 뒤따랐다.

밤에는 잠을 자기가 무서워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고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했다.


-> 공부를 할 때는 그런 우울한 느낌이 안 들어요?

- 딱히... 공부에 집중하다 보니까 우울할 시간이 없는 것 같아요.

-> 원래 그렇게까지 굉장히 우울할 때는 공부에 집중을 할 수가 없어요.

-> 일반적인 우울감과는 좀 다른 느낌이네요.

-> 집중할 게 있을 때는 괜찮고, 집중할 게 없을 때는 과하게 우울하네요.

-> 진짜 그렇게까지 우울하면 사실 공부도 안 되고 집중도 안되고

-> 정리도 안 되고 글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거든요.

->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시간에 그런 우울하다는 강박적인 생각이 계속 반복되나 봐요.

-> 실제로 진짜 감정적으로 우울하다기보다는 그런 느낌이 드네요.


신기하다. 나는 지금 가짜 우울을 겪고 있다는 말인가?

우울하다, 울적하다 그런 마음이 너무 심해서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과식도 심해졌고, 운동도 일주일이나 빠져서 속상한 요즘이었는데...

그래도 오히려 운동보다는 공부 쪽이 더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공부하는 것도 잘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은근한 스트레스를 유발하지만

운동보다 시작하기가 훨씬 쉽다. 제일 중요한 것은 뿌듯함이 생긴다는 것이다.


치료에 차도가 없다고만 느꼈던 지난날들과는 달리 오늘의 상담 내용을

돌아보니 꽤 차도가 생기기 시작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유튜브 영상도 보지 못했던 내가 공부를 하려고 1시간이 넘는

영상을 보기도 하고, 집중하기도 한다.

집중을 못해서 책을 한 장도 못 넘기던 때가 있었는데,

심리학 책을 덥석덥석 집어 들고는 신나게 책장을 넘긴다.

가장 중요한 점은 뭐라도 하고 있다는 것.

대학을 졸업하고 하는 일이라고는 집에서 밥 먹고 자는 일뿐이었는데

용기를 내서 진료를 받으러 다니고, 헬스장도 등록해 보고,

공부도 해보고, 책도 읽으면서 꽤 많은 것을 도전해보고 있다.

여전히 내 마음에 들기에는 한참 부족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만하다.

현재 상황을 너무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럴수록 더 우울해지는 일뿐일 테니.

나도 잘하는 게 있을 것이다. 그걸 찾아나가는 도전을 해야 하고,

찾으려는 의지를 가져야 하는 건데 나만의 장기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니 너무 바보 같은 발상이었다.

느리지만 천천히 온전히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면서 걸어 나가고 싶다.

혹여나 그 과정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느끼지 못해도 괜찮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하더라도 절대 늦은 것이 아님을 

몸소 체험하고 있으니 다음 걸음도 경쾌하게 걸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22회차. 한 걸음, 두 걸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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