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소나기는 피하고 보는 거야

암환자 그를 사랑하는 아내

by 본비 은혜

맑은 날만 기억났다.
그리고 맑은 날만 있을 줄 알았다.
2024년 10월 10일을 맞이하기 전에는.


많은 것들에 대해 얘기하면서 우리가 가능한 계획들을 그렇게 세웠었다.
다 가능했으니까, 다 할 줄 알았다.
매년 으레 하는 건강검진에서 딱 걸렸다.

그게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무방비 상태에서 소나기를 만났다. 폭우를 만났다.
휩쓸려 갈 것 같은 폭우 속에서 우리를 지키고자 애썼다. 최선이 뭔지도 모른 채, 닥치는 대로 할 수 있는 대로 버티기를 했다.
우리만 힘든 것 같은 마음일 때 혼자가 아니라고 사방에서 우리의 물기를 닦아주었다.
진작에 이웃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마음으로 <80인 중보기도대>에 합류했는데, 그건 나를 위한 예비였나 싶게 80인은 나와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
"사실, 우리 부부도 암 선고받고 치료 중이에요. 지금이 제일 힘든 때예요. 기도할게요"
두 번쯤 인사했던 분이 몹시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화를 주셨었다. 우왕좌왕할 이때에 폭우를 지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새벽 기도를 마치면 내 성경 책 옆에 밤새 구운 따듯한 계란이 놓여 있고,
그의 안부를 묻는 분에게 "동치미를 먹고 싶어 해요."라고 하니, 그분이 동치미를 수소문해 주셔서 전혀 다른 곳에서 동치미와 개운한 반찬들이 세트로 왔다.

병실로 12첩 반상을 해 오신 분, 멀리 캐나다에서 환자에게 좋을 만한 것들을 들고 오신 분, 아침 먹으라고 스타벅스 커피와 샌드위치를 사 오며, 김을 한 장 한 장 기도하면서 구웠다고 전해주는 언니, 항암 가기 전에 한 상을 차려 먹게 해 준 언니, 반찬 통이 모자랄 만큼 입맛 돋울만한 것들을 골고루 챙겨주신 분들, 본인도 받은 귀한 것을 덜어내 주신 분들, 내외가 직접 깐 생강을 쪄서 말려주신 분, 도토리가루와 좋은 계란을, 들기름과 통깨, 떨어지지 않게 받은 소고기며 장어, 지금도 먹는 김장 김치, 항암에 좋다는 고가의 버섯가루를 사서 보내주신 분, 책으로 위로금으로 참 별 별것들을 다양한 손길을 통해서 받았다.

환한 얼굴로 밥 사주신 분들 덕분에 맛있는 식사 자리에서 즐거웠던 시간들도 기억이 난다.

온 사방에서 우리를 비추는 듯했다.
꼭 우리가 영화 주인공인 것처럼. 아니, 우리가 주인공이었다. 늘 우리에게 관심을 가졌으니까.
폭우 같은 눈물은 계속되지 않았다. 덕분에.
뜨거운 사랑에 젖은 마음이 계속 말라갔다. 덕분에.

그 받은 것들을 자랑하려고 나열한 것이 아니다.
당시 나는 받는 것을 서툴러했다. 고마우면서도 미안해서 무엇으로 갚아야 하나 그 와중에 고민을 했다. 그게 나의 숙제로 다가왔다.

그들의 정성을 생각하면 그냥 받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더러는 과일을, 더러는 고기를 사서 드렸다.

그게 갚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드리는 과일 받을 때 그 표정에서는 좋음이 아니라 무안의 어색한 표정이 읽혔다.
"이걸 받자고 한 건 아닌데, 왜 이런 데까지 신경을 써. 지금은 그냥 받는 거야. "
그분들의 그 표정을 그땐 잘 몰랐는데, 이젠 알겠다.

생각지 못한 사고는 생각지 못한 곳에서 일어났다. 마냥 해맑게 웃는 게 매력인 직장동료는 그는 남편의 사고 앞에서 해맑음이 잠시 사라졌다. 소나기가 그에게로 간 모양이다.
1년 전에 내가 겪었던 그 감정의 소용돌이를 그가 지금 겪고 있어 마음이 아렸다.


내가 받았던 것처럼 그가 좋아하는 해장국을 포장해 전했다.
그의 손에 들린, 나를 향하는 아이스크림 봉지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이걸 받자고 한 건 아닌데, 왜 이런 데까지 신경을 써" 나도 무안하고 어색한 마음이 내 마음에 박혔다.
그도 처음이라 나처럼 그런 거지.
인사성이 좀 밝아야지. 그는 그런 사람이다.
'이러지 말자, 그냥 받을 줄 도 알아야지.' 마음에서 자꾸만 잔소리를 한다.
'소나기는 피하고 보는 거야. 결국 피해지더라. 먹구름도 없어지더라. 지금은 나와 아이들, 남편만 생각하는 거야. 그거만 해.'
왕터 덕분언니가 싸 준 겉절이를 통에 담으면서 가만히 그를 떠올린다.
때맞춰 사돈 댁에서 사골을 고아 얼려 보내오셨다. 참 지극한 사랑이다.
아이들과 아침 먹도록 한 팩 보내고 싶은데, 연락이나 되려나?
나는 아직도 인사성이 없다. 어떻게 다 인사를 할 수 있을지?
받은 사랑은 물 흐르는 듯 흘려보내는 것이 사람다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러다가 적당한 때에 갚을 날도 올 테고.
넘치도록 받은 사랑이 많은 나는 내 방식대로 생각한다.
"살다 보면 갚아질 날도 오겠지! 그렇지? 아무렴!
우리 그러려면 힘내서 아주 잘 살아야 돼! 알았지!"
내가 나에게, 내가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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