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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성순 Nov 01. 2023

꿈꾸는 열대의 섬, 라겐

1월의 추운 겨울을 아름다운 열대의 섬에서 보내려는 계획을 갖고 마닐라로 향했다. 자연 속에서 최고의 휴식을 누릴 수 있다는 라겐섬이 최종 목적지였다. 먼저 마닐라에서 엘니도까지 간 후 다시 배를 타고 라겐섬으로 들어가야 한다. 

엘니도까지는 시간 절약을 위해 긴 시간 버스를 타는 대신 국내선 비행기를 이용하기로 했다. 국내선 공항은 버스터미널 대합실처럼 혼잡했다. 전광판은 대부분 비행기의 연착을 알리는 붉은 글자로 뒤덮여 있다. 엘니도행 비행기는 무려 7시간을 연착했다. 섬이 많은 나라이니 기상조건에 따라 비행기의 이착륙이 일정하지 않을 것을 고려한다 해도 이건 너무 심하다 싶다. 그러나 항의하거나 불평하는 사람 하나 없이 평온하게들 기다리고 있다. 조바심치며 지루해하는 사람은 나뿐인 듯하다.

엘니도행 비행기는 50여 명이 타는 소형 프로펠러 비행기다. 1시간 남짓한 짧은 비행 후 엘니도 공항에 도착했다. 엘니도 공항 규모는 시골 기차역 정도이지만 시설은 호텔 로비처럼 깔끔하고 환하다. 여행용 가방도 직원들이 손으로 내려 로비에 정렬해 놓으면 각자 찾아간다. 처음 경험해 보는 소형 비행장 시스템이 신기하다. 늦은 밤 리조트 도착. 내일은 라겐섬으로 간다.      

  엘니도에서는 배를 타고 한 시간쯤 가면 라겐섬이다. 배를 타기 위해 밴으로 십여 분 가니 한적한 해변에 정자처럼 생긴 라운지가 있다. 라겐섬으로 가는 사람들을 위해 시원한 음료수와 달달한 간식이 준비되어 있다. 시럽을 씌운 튀긴 바나나와 푸딩처럼 생긴 작은 케이크가 먹음직스럽다. 

해안으로 나가니 코코넛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라겐섬으로 가는 배를 타러 가는 다리가 보인다. 넓은 바다를 향해 쭉 뻗어 있는 다리는 가끔 나를 아찔하게 만든다. 마치 그 끝이 하늘에 닿아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스무 명 남짓 탈 수 있는 쾌속선으로 한 시간쯤, 이국적인 섬들이 떠 있는 바다를 달렸다. 1월의 열대 바닷바람이 기분 좋은 서늘함으로 가슴 가득 안긴다. 

도착한 곳에는 누구나 휴양지로 한번 상상해 봄 직한, 그러면서도 감탄을 자아내는 그림 같은 열대의 섬이 있다. 무대 배경처럼 불쑥불쑥 솟아오른 봉우리들이 반원 형태로 리조트의 뒤를 감싸고 있고, 눈 닿는 곳마다 열대의 초록 식물들이 무성하다. 앞으로 펼쳐진 바다는 반달 모양의 해안선을 만들며 안으로 들어와 아늑한 내해를 만든다. 해안선 좌우 양쪽에 자리 잡은 수상가옥들은 밤이 되면 조명이 바닷물에 비춰 더욱 아름다웠다. 

배가 선착장에 도착하자 전통악기가 연주되고 열대 식물 목걸이를 걸어 준다. 그리고 예쁜 마음 한 조각으로 장식한 Welcome tea 한잔. 낯선 향과 레몬 맛이 느껴진다. 

 


 리조트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호핑투어는 모터보트를 이용한 맹그로브 숲 투어와 사라져 가는 모래섬에서의 사진 촬영, 스노클링 순서다. 나는 스노클링을 한껏 기대하고 있었다. 15년 전쯤 세부에서 스킨스쿠버를 하며 본 바닷속 세계가 너무 투명하고 아름다워 꿈꾸는 듯 신비로웠다. 라겐섬은 필리핀에서도 관광지 개발이 늦은 편이라 하니 오염되지 않은 바다의 아름다움을, 그때의 감동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스노클링 마스크를 통해 본 바닷속은 죽은 산호들의 무덤과 뿌옇게 오염된 물, 드문드문 보이는 무채색의 물고기들뿐이다. 좀 더 멀리 나가면 조금씩 나아지기는 했으나 첫 장면의 실망감은 그대로 남는다. 

라겐섬 일대는 위치에 따라 오염도가 많이 차이가 난다고 한다. 다음날 리틀 라군섬 쪽으로 호핑투어를 갔다 온 일행들은 맑은 바다와 알록달록한 열대어들을 맘껏 보았다고 한다. 나는 그날 탈이 나 하루종일 누워있다가 오후에 정신을 차렸다. 산책 겸 리조트를 돌아다니다 전망 좋은 곳에 있는 작은 도서관을 발견했다. 여러 나라 글로 된 책들 속에서 우리나라 책도 5권이나 꽂혀있었다. 이국에서 만난 한글이 반갑다.     

  호핑투어 중간에 제공되는 식사는 푸짐하다. 뱃사람들이 배에서 음식을 만들고 싱싱한 열대과일들을 손질하여 예쁘게 담아 작은 카약에 실어서 해변으로 가져온다. 우리나라 매운탕 비슷한 뜨거운 국물 요리도 있어서 다들 한국인의 속성을 드러내며 뜨끈한 국물에 밥을 말아먹었다. 

이곳 뱃사람들은 늘 유쾌하고 활기차다.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들고 밧줄을 당겨 배의 방향을 바꾸고 바닷물의 흐름에 맞춰 두 배를 나란히 한 다음 짐을 옮기는 손길이 능숙하다. 위험해 보이는 아슬아슬한 상황에서도 걱정스럽게 소리치는 우리를 향해 오케이를 외쳐준다. 

이곳도 관광지로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몰려오고 자연환경이 오염되면서 천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바다는 줄어들고 있는 것 같다. 인간들의 약탈적인 침범에 붕괴해 버린 자연의 아름다움에 비해, 이곳을 지키는 이들은 바다와 함께 살아온 날들의 두께만큼의 저항력으로 자긍심을 지키고 있었다. 산호초 무덤을 보며 우울했던 마음에 작은 위안이 된다.     

  문을 여니 눅눅한 바닷바람이 밀려든다. 여명은 이미 지나간 듯 바다가 훤하다. 섬을 감싸고 밀려드는 바닷물이 수상가옥 아래에서 출렁인다. 테라스에 나와 심호흡을 하며 꿈에서 깨어나고 있는 낯선 바다의 공기로 나를 채워본다. 테라스 한켠에 무심히 피어 있는 이름 모를 붉은 꽃, 그 화려함과 무심함에 나도 잠을 깬다. 오늘 하루 새롭게 맞이할 세상을 기대하며.


Welcome tea와 호핑투어 중 제공된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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