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아몬드비치와 요쿨살론
오전 10시 가까이 되었으나 어두운 도로를 달리는 버스만 깨어있다. 밤이 미처 물러가지 않은 주변은 어둠에 잠겨 고요하고 버스 불빛이 닿는 한줄기 길만이 잠을 깬다.
2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바닷가 다이아몬드 비치에는 크고 작은 얼음덩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검은 모래 위에서 반짝이는 얼음들은 과연 검은 천 위의 다이아몬드 같다. 해변으로 흘러드는 물줄기에는 더 큰 얼음들이 떠내려오는데 자그마한 산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크기도 있다. 얼음덩이들은 크기도, 모양도, 색깔도 다양하다. 투명하고 단단해 보이는 얼음이 있는가 하면 설산의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온 듯 눈을 뭉쳐놓은 것처럼 하얀 덩어리에 푸른빛이 도는 것도 있다. 이 물줄기의 위쪽 어딘가에 거인들이 살고 있어 엎치락뒤치락 싸우다 부서진 얼음덩이들이 물을 따라 내려온 것 같다. 물길이 비좁을 정도로 크고 많은 빙하 조각들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니 아마도 꽤 큰 싸움이었나 보다. 빙하 덩어리가 느리게 흘러 해안에 도착하면 파도에 떠밀리며 바닷속으로 녹아 사라지기도 하고 큰 덩어리들은 해변에 여기저기 늘어서 있다. 검은 모래 위에서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얼음덩이들은 밀려오는 파도를 마주하고 서서 수천 년 혹은 수만 년에 걸친 여정을 마무리하려는 듯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다.
거센 바닷바람을 피해 들어간 식당은 아담하고 조용했다. 관광지의 식당답지 않게 사람들의 눈에 띄고 싶지 않은 듯 길에서 슬쩍 비켜난 곳인 데다 조그만 간판조차 수줍은 듯 한쪽 구석에 숨어있다. 음식은 따듯하고 깔끔하고 달콤했다.
오후에는 요쿨살론 투어다. 빙하 지역으로 가는 전용 차량은 비포장도로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신나게 달린다. 드디어 얼음으로 뒤덮인 겨울왕국의 초입에 섰다. 거대한 빙하언덕이 수백 미터에 달하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펼쳐져 있다. 빙하언덕은 수천 년 동안 잠들어있는 고대의 생명체가 느린 호흡을 하며 누워있는 것 같다.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배의 옆부분을 드러내고 있다.
빙하언덕 위를 걷기 위해 아이젠을 신고 보호 헬멧도 썼다. 빙하 투어 전문 가이드는 미끄러질까 조심스럽게 걷지 말고 자신 있게 발을 내디디며 아이젠을 얼음에 박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왠지 빙하언덕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 먼 옛날 투명하게 빛났을 빙하언덕은 사람들의 날카로운 발길에 곳곳이 패이고 세월의 먼지가 쌓여 뿌옇게 제 모습을 잃은 채 사람들의 발길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며 자는 듯 엎드려있다.
그러나 빙하언덕은 여전히 숨 쉬고 있는 듯하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아직 깨끗한 곳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푸르스름한 얼음 속에 크고 작은 기포들을 품고 있다. 기포들은 우주 공간을 떠도는 행성처럼 반투명의 흐릿한 공간 속에 떠 있다. 저 아래 더 깊은 곳 어딘가에는 분명 은하수처럼 흐르는 물줄기가 있어 혈관의 피처럼 흘러가고 있을 듯하다.
빙하언덕을 한참 걷다 보니 원형의 얼음벽을 세운 커다란 구덩이가 나타난다. 내려가는 길은 얼음을 대충 다듬어 만든 계단과 밧줄이 전부다. 조심스럽게 내려가니 사방의 얼음벽이 바람을 막아주어 오히려 덜 춥다.
얼음 구덩이 벽면 균열을 따라 들어가면 거대한 빙하 벽과 좁은 틈이 보인다. 그 안에는 곡선을 이룬 다양한 빙하덩어리들이 어우러지고 맞닿아 음영을 이루는데 마치 거대 생명체의 몸속에 들어와 식도나 위장 같은 장기를 보는듯하다. 얼음이 좀 더 투명하거나 햇빛이 닿은 곳은 파르스름한 빛을 내며 보석처럼 반짝이는데 살아있는 생명체의 뇌수처럼 느껴진다.
틈에서 밖으로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얼음벽을 한 바퀴 돌아본다. 아름답고 신비하게 빛나는 파르스름하면서 투명한 색깔, 정교하게 새기고 다듬은 듯한 반복되는 무늬, 우아하게 뻗은 곡선들이 겹치며 만들어내는 조화로운 공간들. 자연이 수만 년에 걸쳐 무심히 빚어낸 예술작품이다. 얼음이 얼고 눈이 내리고 비가 내리고 가끔은 녹기도 하면서 엉기고 압축되는 과정을 수천, 수만 년 동안 반복하며 완성한 시간의 노래. 그 긴 시간과 인내를 어떤 예술가가 이겨낼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