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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성순 Aug 01. 2024

대자연과의 만남

싱벨리어 국립공원

겨울 여행은 밤에 떠나는 게 좋다. 남겨두고 가는 풍경이 너무 쓸쓸해서 낯선 곳에 대한 설렘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그곳이 아이슬란드처럼 몹시 추운 곳이라 할지라도, 아침에 떠오를 태양을 상상하면 마음이 따듯해진다. 

11월도 거의 끝나가는 어느 겨울날, 쓸쓸한 밤 풍경과 창백한 공항을 뒤로하고 아이슬란드를 향해 떠났다. 긴 비행 끝에 닿은 곳에서는 해가 뜨고 있었다. 어둑한 하늘과 구름바다가 만나는 지점 저 멀리 황금빛이 스며 나오기 시작하더니 점차 주홍으로 물들며 아침이 밝아온다.

어둠 속에서 등장하는 태양은 극적이다. 빛은 느리게 등장하지만 어둠은 빠르게 물러난다.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어 구름을 뚫고 내려가자 캬플라비크 일대가 드러나는데 그곳에는 아직 아침이 오지 않아 어스름하다. 내려다보는 그곳에는 화려한 조명도, 우뚝 선 건물도 없다. 지구 표면에 서식하는 작은 생명체의 군상처럼 아이슬란드의 건물들은 겸손하게 나직한 높이로 지어져 있다. 소박한 인공 구조물에 비해 황량하고 드넓은 평지와 아득한 지평선이 풍경을 압도한다. 

아이슬란드의 첫인상은 광활한 자연 속에 인간들이 스며들어 살아가는 듯한 느낌이다. 그들은 엄마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아기처럼 거대한 자연의 품에 안겨있었다.


버스는 싱벨리어 국립공원을 향해 달린다. 황량하고 광대한 땅이 끝없이 펼쳐져 지평선이 아득하다. 한참을 달려야 몇 그루의 침엽수를 만날 수 있을 뿐이다. 달리는 버스 차창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두꺼운 잿빛 구름 더미가 하늘을 가득 채우고 점점 아래로 내려와 지표면에 바짝 다가서 있다. 장기하의 노랫말처럼 “조금만 뛰어도 정수리를 쿵하고 찧을 것 같은” 모습이다. 버스가 달리는 방향의 끄트머리쯤에 햇빛이 내리고 있다. 온 하늘이 짙은 구름으로 덮인 터라 마치 그곳만 하늘에서 핀 조명(pin spot)을 비추는 것 같다.


하늘을 꽉 채운 구름 속 저 멀리에서는 태양의 존재를 알리는듯한 장면을 연출한다


자연은 무심히 변화무쌍하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변화하는 자연에 삶의 감정을 실어 읽어낸다. 내가 지금껏 경험한 날씨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했기에, 거기에 장단 맞추는 감정의 굴곡 또한  시간의 흐름을 따라 삶 속에 스며들곤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처음 만난 자연은 몹시도 낯설었다. 경이로웠고 장엄했다. 열려있는 거대한 공간 속에 서로 다른 시간대인 듯한 자연의 다양한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드넓은 한 장의 화폭 속에 자연의 온갖 변화가 모두 담겨있어 한눈에 보인다. 온 세상이 짙은 구름으로 둘러싸여 어두컴컴한데 저 멀리 구름 틈을 비집고 나오는 한 줌의 햇빛이 보인다. 아스라이 보이는 지평선을 따라 짙은 구름 그늘의 어스름에 잠긴 설산이 줄지어 서 있다. 더 먼 곳 화폭의 한 귀퉁이에는 하얀 만년설을 이고 주홍빛 햇살에 반짝이는 거대한 산의 정상이 사진을 오려 붙인 듯 혹은 이곳과 다른 또 하나의 세계인 듯 자리 잡고 있다.

나는 이 광대한 자연이 펼쳐놓은 예기치 못한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며, 이곳의 자연은 인간의 감정이 개입할 여지가 없음을 깨닫는다. 자연의 실체가 한꺼번에 나를 덮쳐와 감정의 흐름 따위는 마구 휘저어버리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야 자연을 제대로 보고 느끼고 있다. 내가 자연의 본질에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다.


싱벨리어 국립공원의 규모는 엄청나다. 시야가 탁 트여 있으니 더 아득하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에는 햇빛이 환하고 비의 흔적이 사라졌다. 싱벨리어 국립공원은 맑은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전망대 가는 길은 화산지형의 협곡 사이로 나 있다. 한쪽은 화산석이 주상절리처럼 층층이 쌓여있고 맞은편은 바위마다 이끼들이 소복이 쌓여 묘한 대조를 이룬다. 길을 내려가 전망대에 이르면 끝이 보이지 않는 황무지와 어지러이 흐르는 물길들이 보인다. 이곳은 북미대륙판과 유라시아대륙판이 만나는 경계다. 지금도 조금씩 벌어지며 두 대륙이 멀어져 가는 지각 활동을 하고 있다. 그 균열을 탐험하려는 스쿠버다이버들은 백여 미터나 이어지는 깊이를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 눈에 보이는 풍경도, 보이지 않는 풍경도 그 규모가 놀라울 뿐이다.


전망대 가는 길 양쪽은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소복이 쌓인 이끼가 탐스럽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굴포스 폭포를 보러 갔다. 거대한 대지가 둘로 갈라져 절벽을 만들고 그 절벽 아래 또 다른 균열이 일어나 이중의 절벽이 형성되어 있다. 중층을 이룬 절벽에는 풍부한 수량의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는 게 상류에서 장마라도 진 듯하다. 큰 계곡도 없는데 어디서 그 많은 물이 쏟아져 내리는지 궁금해진다. 저 우울한 구름 어딘가에 한 뭉텅이의 눈물이 들어있다가 왈칵 쏟아낸 게 아닐지. 폭포는 뽀얀 물보라를 일으켜 구경꾼들을 적시며 가까이 오지 말라 하지만, 사람들은 추운 날씨가 무색하게 폭포 안갯속으로 들어가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절벽에서 내려다본 굴포스. 중층의 절벽 아래 폭포는 수십 미터 아래로 떨어지며 뽀얀 물안개를 만든다


게이시르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3시가 조금 지난 시간인데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넓은 구역에 걸쳐 곳곳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라 주변이 자욱하다. 간헐천과 지열이 만나 만들어낸 장관이다. 실내용 분수처럼 귀엽게 퐁퐁 물이 솟아나는 작은 규모의 간헐천이 있는가 하면 물이 치솟은 후 수십 미터의 수증기를 뿜어내는 곳도 있다. 

규모가 큰 간헐천은 4~5분 간격으로 물과 수증기를 뿜는데 매번 모습도 다르고 높이가 장대하여 좀 더 새롭고 큰 자연의 분수 쇼를 보려는 욕심에 자리를 뜨지 못하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저 멀리 지평선에는 노을이 물들며 해가 지기 시작한다. 


간헐천이 뿜어져 나온 후에는 수십 미터에 달하는 증기가 올라오는데 매번 다른 모습이라 눈을 뗄 수가 없다. 
노을이 물들기 시작한 현지 시각은 오후 3시 5분이다.



숙소가 있는 비크로 오는 길은 캄캄한 밤길이었다. 밤늦게 도착한 작은 마을에는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고 관광객들만 어둠 속을 어슬렁거린다. 오후 4시가 되기도 전이니 이방인들에게는 너무 일찍 와버린 밤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가 보다. 

건너편에 보이는 마을은 어둠에 잠겨있고 가로등과 불 켜진 몇몇 집들이 보인다. 언덕 위에는 붉은 지붕의 교회가 밝은 빛을 내며 마을을 지키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두 잠든 시간에도, 그리고 길게 계속될 이 밤 내내 홀로 깨어있겠다는 듯이.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작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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