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이 계속 닫혀 있으니 비행기 안은 계속 밤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아마 진짜 밤이 된듯하다.
비행기가 리마 공항에 접근하며 비행창을 여니 내 예상대로 새까만 밤이다. 비행기가 기체를 기울여 하강한다. 작은 비행기 창으로 불빛들이 보인다. 검게 꿈틀거리는 거대한 산맥들 사이사이 분지에 불빛들이 소복소복 모여있다. 오랜 비행 끝에 내려다보는 밤풍경이라 불빛이 더욱 따듯해 보인다.
지구 반대편, 이 낯선 곳에서도 우리와 같은 종의 생명체가 이토록 큰 무리를 지어 땅을 차지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대견하다. 그러나 리마는 악의의 도시가 아니던가? 같은 인류이면서 파괴하고 정복하고 살해하고 약탈하기 위해 세운 도시.
리마는 남미를 침략한 프란시스코 피사로에 의해 건설되었다. 피사로와 그의 형제들은 이곳을 거점으로, 제대로 된 철제 무기조차 없는 잉카인들을 무자비하게 유린했다. 그렇게 잉카제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스페인 본국과의 연락이나 지원 병력, 보급품 조달을 위해 세운 도시가 리마이다.
그런 사연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불빛은 따듯하다. 광활한 어둠의 산맥들 속에서 삶의 불을 밝히고 있는 나약한 인간들의 모습, 피해자와 가해자의 피와 살이 어우러진 채 서로 보듬고 살고 있었다.
공항을 나오니 공기가 후끈하다. 그래도 바람이 불면 선선한 기운이 느껴지니 여행하기는 좋은 날씨다. 호텔까지 40여분이 걸렸다. 늦은 시간이라 도로에는 차도 별로 없는데 다들 서두르지 않고 차례와 신호를 기다리며 느긋하게 간다.
체크인하고 씻고 누우니 새벽 2시가 넘었다. 뒤척이다 수면제 반알을 먹었다.
본격적인 여행 첫날. 점심은 한식으로 비빔밥을 먹었다. 1층은 한국식 빙수를 파는 디저트 카페이고 2층은 식당이다. 식당 입구에 식당 주요 메뉴와 함께 BTS 정국의 사진이 걸린걸 보니 남미에서의 K-pop의 인기가 실감 난다.
비빔밥과 같이 나온 미역 오이냉국이 조금 짜서 물을 타기는 했으나 김치와 김, 잡채로 구색을 갖추었다. 한국인 사장이 나와 인사를 했다. 이렇게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와 억척스럽게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모습이 장하기도 하고 괜히 짠하다.
식사 후 리마 거리를 걸었다. 골목은 좁으나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고 예쁜 건물들도 많다. 일요일이라선지 거리마다 사람들이 붐빈다. 거리에는 서로 다른 시간대의 건물들이 뒤섞여 있다. 식민지풍의 옛 건물들이 낡은 목재창과 빛바랜 벽으로 서있는가 하면 맞은편에는 현대식 건물이 나란히 서있다.
산마르틴 광장 도착. 남미 해방 영웅 산마르틴의 기마상이 우뚝 서있다.
남미를 침략해 정복한 스페인은, 정복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부왕령 제도를 만들었다. 본국에서 파견된 왕의 대리인 부왕이 정복지역을 다스렸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남미에 정착한 스페인 정복자들이 부왕의 지배와 본국의 간섭을 거부하며 곳곳에서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산마르틴은 칠레와 페루에서 스페인 왕당군을 물리쳐 독립에 공헌한 장군이다. 그래서 출신지인 아르헨티나뿐만 아니라 칠레와 페루에서도 존경을 받으며 곳곳에 동상이나 기념물이 있다고 한다.
광장은 깨끗하고 비교적 한적하다. 현지인 가이드 아나는 전통민속공연을 준비해 왔다. 의상과 음악을 갖춘 후 다양한 원주민 민속춤을 선보인다. 작고 단단한 체구에서 에너지가 뿜어져 나와 주변에서 구경하는 사람들까지 흥이 오르게 만든다.
광장 다른 한쪽에서도 청년 무리들이 모여 전통춤 공연을 하고 있다. 스페인 문화로 둘러싸인 이 광장에서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고 보여주려는 젊은 그들이 아름답다. 남미를 뒤덮은 스페인 문화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인디오 문화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다.
침략자들이 독립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기념탐 아래서의 이 공연은 무척이나 상징적으로 보였다.
산마르틴 광장에서 아르마스 광장까지 거리를 구경하며 걸었다. 거리 양편에서 공연하는 사람, 물건을 파는 사람, 음료를 파는 행상, 관광객들 그리고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 보인다. 경찰들은 곳곳에 자리를 지키고 서있거나 돌아다니며 근무한다. 아르마스 광장으로 오니 경찰이 더 많다.
광장을 돌아보고 있는데 성당 쪽 골목이 시끌시끌하더니 춤 퍼레이드가 몰려온다. 스페인 풍의 춤꾼들이 앞서고 뒤이어 인디언 전통춤, 정글지역 원주민 춤을 추는 사람들이 화려한 원색의 옷을 입고 무리 지어 공연을 한다. 아나콘다로 보이는 거대한 헝겊 뱀 모형을 들고 춤추는 패도 있다.
이곳 남미 지역의 사람들은 어떤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볼까? 침략자 스페인 인의 피와 침략당한 잉카인들의 피가 골고루 섞인 이들은 어떤 태도로 자신의 조상들이 남긴 발자취를 평가할까?
문득 광장을 메운 사람들의 구성을 돌아본다. 경찰제복을 입은 사람들은 유럽인 성향의 서구적 얼굴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에 비해 초라한 좌판 앞에 앉아있거나 길거리 공연을 하며 땀을 흘리는 아이들은 좀 더 인디언 원주민의 모습이 강하다.
이들 가해자, 피해자의 역사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인가? 유럽계 백인들은 사회의 상류층을, 백인과 인디오의 혼혈인 메스티소는 중류층을, 인디오나 흑인들 대다수는 빈곤층인 남미 사회를 보면 그들의 역사가 보인다.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불분명한 선, 그래서 따지거나 보상해 줄 수도 없는 뒤엉킨 역사는 그 매듭의 시작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럽고 단단하여 지금까지도 엉킨 채 그 흐름을 계속하고 있다.
어쩌면 체게바라 같은 특별한 인물이 이 땅에 태어나고 정의를 외치며 일생을 불태웠던 것도 이러한 사회적 모순에 대한 깊은 성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나의 매듭이라도 풀어내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자신의 삶을 바쳤으리라.
저녁시간까지 여유가 있어서 '사랑하는 연인들의 공원'에 들렀다. 키스하는 남녀의 거대한 조각이 하늘을 배경으로 높직이 세워져 있다. 두 몸이 엉킨 자세와 살구색 재질이 에로틱함을 더한다. 푸른 하늘과 밝은 햇살, 태평양의 파도가 밀려오는 열린 공간에서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의 모습이 당당하게 표현되어 있다.
키스받는 여인의 발 위에 비둘기 두 마리가 앉아 부리를 마주 부딪히며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다. 그 장면이 훨씬 직관적이고 열정이 담겨있어 에로틱하게 보인다. 이 세상 모든 생명체들이 암수 정답게 세대를 이어가니 아름다우면서도 감동적이다.
호텔에 잠시 들른 후 저녁을 먹으러 갔다. 저녁은 문어요리다. 초장에 찍어먹는 문어와는 다른 독특한 맛이다. 익숙한 발사믹 소스와 부드럽게 적당히 잘 익힌 문어다리가 어우러져 맛있게 먹었다.
내일은 사막투어 후 이카에서 자고, 나스카 라인 경비행기 투어 후 다시 이 호텔로 와서 1박을 한다고 한다. 1박 2 일용 가방을 싸고 나머지 짐은 캐리어에 담아 호텔에 맡겨둘 거란다. 1박 2일 용 가방이 필요한 사람들과 마트 구경하려는 사람들은 인솔자와 가고 서너 명은 호텔로 왔다.
하루치 가방을 싸는데 시간이 꽤 많이 걸렸다. 사막투어에 대비하는 게 좀 까다롭다. 햇빛과 먼지, 사막에서의 밤 추위 등등을 고려해야 한다.
내일은 8시 출발이라 하니 6시쯤 아침을 먹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