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리마를 출발해서 이카로 가는 버스를 탔다. 해안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달리니 오른쪽은 드넓은 태평양이다. 잘 다듬어진 해변은 별로 없으나 시원하게 시야에 들어오는 바다와 수평선, 그 위에 함부로 칠해진 물감처럼 떠있는 구름들을 맘껏 감상한다.
중간에 휴게소를 들렀다. 우리나라의 쇠락한 국도변 휴게소처럼 주차장은 썰렁하게 비어있고 편의점 규모의 가게가 있다. 매대를 돌아보다 ‘잉카칩스’라는 과자 한 봉지를 샀다. 7.9 소올, 약 3000원 정도다. 고구마, 바나나, 당근, 감자등을 얇게 슬라이스 한 뒤 튀겨 칩 형태로 만들었다. 냉장음료 코너에는 코카콜라와 나란히 잉카콜라가 전시되어 있다.
'잉카'라는 단어는 이곳 주민들의 뿌리인듯 곳곳에 등장한다. 코카콜라와 나란히 잉카 콜라가 있고 잉카 콜라가 코카콜라를 이긴다. 과거와 연결된 끈이 있는 먹거리에는 '잉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그것은 스페인 식민지라는 긴 터널을 지나면서도 면면히 이어온 그들의 자부심이다.
점심 식사 시간, '피스코'라는 페루 전통 술 체험장에 들렀다.
피스코는 와인을 증류시켜 만든 남미 특유의 술로 도수가 높고(35~43도 정도) 페루와 칠레에서 대중적으로 널리 마신다.
피스코 체험장에서는 술의 제조에 사용된 증류기나 발효시키는 독특한 모양의 항아리를 볼 수 있다. 둘러본 후에는 낮은 긴 의자에 앉아 제조과정을 설명 들으면서 여러 종류의 피스코를 맛볼 수 있다.
햇볕은 강하나 선선한 바람이 불고, 주변에 대추야자나무나 망고나무 같은 이국적인 식물들이 있으니 도심 관광지와는 다른 정취가 느껴진다.
다시 이카로 가기 위해 5시간 30분이라는 긴 시간을 버스로 이동했다. 주변 풍경은 황량하다. 고속도로와 국도를 이용했는데 오늘도 기사는 정속주행이다. 왕복 4차선 도로가 휑하니 비어있는데도 기사는 답답한 속도로 정속주행을 한다. 이곳 기사들은 주행거리보다 주행시간에 따라 임금을 받는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 추론을 해본다. 혹은 버스 내에 감시용 속도계가 장착되어 있을 수도 있겠다. 혹은 그저 그들의 느긋한 성향과 나의 조급증이 만나 생긴 부작용인가?
드디어 숙소 도착.
꽤 규모가 큰 빌라 형태의 건물이다. 둥근 지붕을 가진 1~2층 건물들이 널찍하게 배치되어 있는데 건물 사이사이에는 잘 다듬어진 화단과 분수대, 인공호수, 수영장 등이 있다. 건물이 평면적으로 넓게 배치되어 로비에 가려면 한참을 걷는다. 그러나 문 밖에는 시원한 풍경이 있고, 4인 숙소를 배정받아 둘이서 사용하니 마음이 여유롭다.
숙소에서 짐을 풀고 재정비를 한 후 사막을 향해 출발.
버기카를 타고 사막을 달렸다.
눈 닿는 곳은 모두 모래 언덕이다. 오랜 바람이 그려낸 구불구불한 곡선과 햇빛 아래 빛나는 언덕 경사면, 부드러운 그림자의 그라데이션. 그 넓은 사막 위를 꼬물꼬물 무당벌레처럼 버기카들이 달려가고 있다.
한눈에 보면 사막은 인간의 발자국과 차바퀴가 어지러이 찍힌 곳과 어떤 흔적도 없이 말끔하고 우아한 곡선을 간직한 오염되지 않은 사막으로 나뉜다. 흔적 없는 그곳은 새로 받아 펼쳐놓은 도화지처럼 깨끗하다. 바람의 자취만 남은 그곳을 나 또한 디뎌보고 싶은 욕망이 있으나 그런 인간의 욕심들이 오염을 더하고 있으니, 자연이 이곳을 정화시킬 때까지 조금만 더 천천히 오염이 진행되었으면 좋겠다.
오아시스 마을 도착.
죽음처럼 고요한 사막 가운데 초록의 생명이 숨 쉬는 곳이다. 거대한 건조함을 뚫고 올라온 한 줌의 샘물이 생명을 불러 모으는 곳. 그곳에서는, 어지러이 뒤섞인 인간의 흔적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침범하고 있다. 그러나 소음 같은 삶의 음악이 있으니 그 또한 아름답게 보아야 하리라.
보드를 타고 모래 언덕 경사로에 엎드리면 잠시 어릴 적 눈썰매 타던 시절로 돌아간다. 경사로는 아찔할 정도로 가파르지만 사방이 온통 부드러운 모래라 다칠 걱정은 없다. 옆으로 휙휙 지나가는 모래바람과 발끝에 닿는 부드러운 모래 감촉을 느끼며 두 발끝으로 방향을 조종하며 내려간다. 속도가 워낙 빨라 방향조종이 쉽지는 않다. 그래서 발 끝을 브레이크로 사용하여 속도를 좀 줄이면 두 번째 모래언덕으로 연결되는 평지 끝에서 보드가 멈춰버린다. 그러면 모양 빠지게 일어나 보드를 들고 두 번째 언덕으로 걸어간 후 다시 보드를 타고 내려가야 한다.
아이들처럼 신나게 놀다 보면 어느덧 해가 질 시간이다. 사막의 일몰은 순식간이다. 서녘하늘이 불그스름하게 물들기 시작하면 태양은 엷은 구름을 뚫고 마지막 빛을 발한다. 그리고 천천히 내려와 사막의 등성이에 앉더니 그 거대하고 아름다운 붉은빛덩어리는 한치의 망설임도 미련도 없이 미끄러지듯 쑥 내려가버린다.
점차 사막 그늘의 음영은 짙어지고 버기카들은 서둘러 돌아갈 길을 재촉하며 하나 둘 사라진다. 엄마의 저녁 먹으라는 외침을 들은 아이들처럼. 그러고 나면 텅 빈 골목처럼 이 사막에도 어둠 속 고요가 찾아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