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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린당한 잉카인들의 자존심, 쿠스코

by 장성순


리마에서 쿠스코로 / 2월 26일 수요일

리마공항에서 쿠스코로 가는 국내선 비행기를 탔다. 공항 건물 안은 사람들로 빼곡해서 어디에도 헐렁한 공간이 없다. 줄이 무척 길었으나 탑승수속은 생각보다 빠르고 수월하게 끝났다. 비행기에 탑승하여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데 활주로 트래픽으로 30분 정도 늦게 출발할 거란다. 분위기를 보니 자주 있는 일인 듯하다. 결국 비행기는 1시간 15분이나 늦게 이륙했다.

기내 간식으로 퀴노아 바가 제공되었다. 퀴노아는 페루와 볼리비아에서 생산되는 슈퍼푸드로 좁쌀처럼 생긴 작고 둥근 곡물이다. 곡물 시리얼 바와 비슷한 맛이다.


쿠스코에 가까워지자 산들은 점차 초록빛을 띤다. 리마 주변의 황량함과 비교된다. 드디어 비운의 역사를 품은 잉카인들의 수도에 왔다.


쿠스코에 도착해서 곧장 식당으로 갔다. 한식당이다. 오랜만에(사실 며칠되지 않았지만 공간적으로 멀리 이동하면서 시간이 늘어나 버린 것 같다) 김치찌개와 감격적인 상봉을 했다. 이 칼칼한 맛이 얼마나 그리웠던지. 간단한 밑반찬을 곁들인 상차림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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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찌개와 제육볶음. 밑반찬과 쌈, 쌈장이 나온다.


쿠스코의 아르마스 광장

아르마스 광장은 명칭부터 침략적이다. 무기를 뜻하는 ‘아르마스’를 사람들이 모이는 곳 ‘광장’과 붙여놓으니 더욱 위협적으로 들린다. 스페인은 남미 지역을 침략하고 정복한 후 곳곳에 아르마스 광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곳을 무력 근거지로 삼아 지배력을 행사했다. 침략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한 곳이기도 했다.


쿠스코는 잉카제국의 중심지였다.

잉카제국의 파차쿠텍 황제는 쿠스코를 중심으로 제국을 4 지역(타완틴수유)으로 나누고 효율적 통치를 위해 도로를 건설했다. 그 규모는 지금의 에쿠아도르, 칠레, 아르헨티나 지역에 이르는 4만 km에 달했다고 한다.

쿠스코의 중심지였던 이곳 아르마스 광장 주변에는 잉카제국의 황제들이 사용하던 신전과 궁전이 있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잉카의 태양신전 코리칸차를 파괴하고 그 자리에 성당을 지어 가톨릭 포교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리고 왕궁은 잉카 황제를 가두고 모욕하는 장소가 되었으며 정복자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광장의 정면에는 웅장하고 화려한 교회 건물이 자리를 차지하고, 사방으로 전면에 회랑을 두른 건물들이 서있다. 그래서 쿠스코의 아르마스 광장은, 중세 시대 흔적이 남은 유럽의 일부분처럼 보인다. 다만 주변에 높은 산이 솟아있어, 구릉지대의 유럽과 풍광이 다르다.

IMG_5693.JPG 쿠스코 아르마스 광장에 밤이 오면 여느 유럽 도시 같은 분위기가 된다.


IMG_5164.JPG 광장을 둘러싼 건물의 전면 회랑은 유럽과 닮았다.



그 광장의 한가운데에 잉카 황제의 동상이 있다. 동상은 분수대 위에서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있다. 침략자의 건물들 한가운데 우뚝 서서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은 잉카황제의 모습은 무척이나 상징적이다. 침략과 지배의 역사 속에서도 잉카인의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지금에야 이런 모습으로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스페인인들이 표면에 드러난 건물들은 파괴했으나 너무나 튼튼했던 기초석은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잉카인들의 내면에 흐르는 정신은 무너지지 않고 지금까지도 살아남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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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만들어 세운 잉카 황제 혹은 잉카 전사의 동상




IMG_5157.JPG 동상 맞은편에 자리 잡은 대성당의 모습


거리에는 인디오 전통 복장을 한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띈다. 그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막 빠져나온 듯 잉카인의 얼굴과 체형을 갖고 있다. 특히 여자들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전통적인 문양의 옷과 큰 보자기를 두르고 있는데 보자기 속에 짐이나 아기들을 넣어 등에 짊어지고 있다. 좀 불편한 포대기 같다.


IMG_5204.JPG 여성의 등에 맨 보자기에는 짐이나 아기가 들어있다. 이들은 키가 작고 통통한 체형이 많다.


광장을 보고 나서 사방으로 연결된 골목골목을 누비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골목이 좁은 편이지만 바닥에 돌을 깔아 깔끔하고 고풍스럽다. 골목을 향해 좁은 문을 낸 가게들이 옹기종기 줄지어 있는데 잉카 전통 문양의 소품과 옷, 인형 등을 팔고 있다.


IMG_5114.JPG 잉카시대의 거대한 석축과 맞은편 작은 가게들이 대조를 이룬다.



골목 양쪽의 높직한 석축은 잉카인들의 돌 다루는 솜씨가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엄청난 크기의 돌을 매끈하게 다듬어 쌓았는데 돌과 돌 사이에 빈틈이 없다. 네모난 돌의 모양을 조금씩 변형시켜 아귀를 맞춘 솜씨가 예술이다. 대표적인 ‘12 각돌’은 거대한 돌 하나에 12개의 각을 만들고 주변 돌을 그 모양에 맞추어 깎아 쌓았다. 돌을 다듬어 이런 연출을 하니 눈 닿는 곳마다 감탄스러운 예술작품이다.


IMG_5126.JPG 크고 단단한 돌들이 조금씩 모양을 양보해 가며 짜 맞춘 듯 빈틈없이 아귀가 꽉 맞물려있다.


모퉁이 돌은 좀 더 묵직하게 생겼는데 모서리를 둥그스름하고 불룩하게 다듬어 안정감을 주고, 윗돌의 양 끝을 살짝 늘어뜨려 편안히 내려앉은 모양새를 만들었다. 마치 돌 위에 인절미 반죽을 올려놓은 듯한 자연스러운 곡선이 아름답다.

이는 우리나라 불국사 석축에서 보이는 그렝이 기법과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 기법이 합쳐진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시각적 정서는 지역과 시대를 막론하고 비슷한 점이 있나 보다.


IMG_5118.JPG 모퉁이 돌은 안정감을 주기 위해 모서리를 불룩하게 하고 윗돌의 양끝을 살짝 늘어뜨렸다.


다만 철제 도구도 없이 이 모든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점이 놀라울 뿐이다. (석축이 만들어진 15세기까지 철제도구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놀랍다. 이는 잉카제국이 스페인에 의해 쉽게 무너진 이유이기도 하다.)


이 석축에 대해 현지인들은 ‘대지진이 있었을 때 유럽인들이 쌓은 돌은 모두 무너졌으나 잉카인들이 쌓은 석축은 더 오래되었음에도 건재했다’며 자랑스럽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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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마스 광장과 연결된 골목들을 돌아다니면 곳곳에서 이런 멋진 석축과 만날 수 있다.


쿠스코는 리마와 분위기가 다르다. 옛 잉카제국의 수도답게 잉카 전통의 느낌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전통적 문양과 색감의 기념품, 강렬한 다갈색 피부의 사람들, 겹쳐 입은 전통 복장과 통통하고 다부진 체격 등이 잉카 시대의 사회를 떠올리게 한다.

쿠스코의 성당 내부의 분위기는 유럽의 성당과는 다른 독특함이 있다. 유럽인들의 신이 이들의 정신을 차지했다기보다는 이들의 신과 융합된 게 아닌가 싶다. 이들의 정신적 뿌리는 그들이 쌓은 석축만큼이나 오래되고 튼튼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쿠스코 광장을 중심으로 골목골목을 누비며 돌아다니다 지쳐 광장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스타벅스 조차 전통적인 분위기의 공간이라 전통적 리듬이나 적어도 스페인어 노래가 나와야 할 것 같다. 그러나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귀에 익은 에드시런과 콜드플레이의 노래였다. 긴 역사를 품은 쿠스코에는 잉카와 스페인 그리고 또 다른 물결이 흘러들어 어우러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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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이 내려다 보이는 스타벅스



리마에서 쿠스코까지 온 데다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느라 지치고 고산증까지 겹쳐 머리가 멍해지고 가벼운 어지럼증이 나타난다. 그래서 숙소로 간다는 말이 반갑다.


버스로 숙소를 향하는데 시내를 벗어나자 갈수록 길이 좁아지더니 비포장도로까지 나타난다. 인가도 없는 외진 길을 한참 달리니 버스 안에서는 ‘귀곡산장’을 운운하며 숙소 상태에 대한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린다.(실제 이동시간은 20여 분 정도였다)

그러나 좁은 길 끝에는 여러 사람들의 걱정이 무색하게 근엄하고 장중한 나무문이 나타났다. 정문을 들어서니 잘 손질된 널찍한 정원이 보인다. 규모도 크고 꽤 번듯한 숙소다.

IMG_5459.JPG 이른 아침 로비에서 정원을 내다보면 구름이 산아래까지 내려와 있다. 이곳의 해발고도가 높기 때문인 듯.
IMG_5214.JPG 이곳은 고산지역이라 뒷산처럼 보이는 저 산도 해발고도 3000~4000m의 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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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한 귀퉁이에는 돌들이 모여 회의라도 하는듯 둥글게 마주보며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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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폭포와 곳곳에 세워진 돌 조각

게다가 기다리던 세탁 서비스도 제공되었다. 세탁물의 무게로 요금을 매기는데 1Kg 당 10달러다. 여행 기간 중 가장 저렴하게 세탁한 곳이다. 그동안 미뤄두었던 빨랫감들을 맡기고 나니 속이 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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