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나스카 라인 투어는 포기했었다. 탈 것에 취약한 내가 요동치는 작은 비행기에 타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대신 햇살 좋은 파라카스 해변에서 느긋하게 바다를 바라보면서 일행을 기다릴 요량이었다.
그러나 당일 아침이 되자 마음이 흔들렸다. 언제 다시 남미에 오겠느냐는 주변의 적극적인 권유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여행 초반이라 지나치게 의욕이 솟아 멀미 정도는 극복할 수 있으리란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가 한몫했다. 그리고 사진으로는 볼 수 없었던 나스카라인의 비밀이 눈으로 직접 확인하면 혹시 보일지도 모른다는 헛된 기대도 있었다.
일찌감치 멀미약을 먹고, 나스카라인 투어 전용 비행장인 피스코 공항으로 갔다. 거기서 경비행기를 타고 30여분을 더 가야 한다. 멀미를 최소화하려고 부조종사 바로 뒤에 앉았다. 조종사들의 비행작업을 가까이에서 보는 것도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비행기가 나스카라인을 향해 가는 동안 펼쳐지는 눈 아래 풍경이 독특하다. 잿빛 고원지대가 넓게 펼쳐지는데 그 위에 풀 한 포기 없는 암회색 산줄기들이 줄지어 서있고 산의 계곡은 희뿌연 색을 띠고 가지처럼 뻗어있다. 한때 계곡물이 흘러 석회석 가루가 말라붙은 것 같은 얼룩처럼 보인다. 메마르고 거친 황량한 지형이 이어진다.
한참을 가면,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이 땅의 끄트머리에 생존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한다. 초록 잎들이 자라는 장방형의 반듯한 밭과 줄지어 선 비닐하우스는 이 황량한 환경을 극복하고 삶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간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척박하고 건조한 자연에 대항하여 삶을 일구는 인간들의 모습이다.
나스카라인은 높고 평탄한 고원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고원의 아랫자락에 쭉 뻗은 도로 위로 트럭과 차들이 다니고 그 바로 옆 고원 끝자락에 선명하고 거대한 소용돌이 그림이 있다. 정확하게 평행을 이루며 빙글빙글 도는 원형의 그림이다. 마치 현재와 과거가 만나는 지점인 것 같다. 그리고 그 주변에 흐릿한 그림들이 여러 개 흩어져있다.
평탄하게 날던 비행기는 이제부터 요동치기 시작한다. 지상에 그려진 그림이니 하늘에서 비행기 창문을 통해보려면 기체를 기울여야 하고, 좌우에 앉은 사람들 모두 보려면 급격히 돌고 기울이는 곡예비행을 해야만 한다. 내가 걱정하던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흐릿하게 보이는 벌새나 사람 그림들, 가지런히 평행을 이룬 선들은 서툰 듯 단순한 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거리가 멀어 언뜻 그 크기가 가늠되지 않지만 나스카라인 옆에 맴돌고 있는 경비행기의 그림자 크기와 비교해 보니 저 그림들이 엄청난 크기임을 알겠다.
생각은 여기까지였고 요동치는 경비행기 때문에 멀미가 나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직접 보면 그 탄생의 비밀이 조금 보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진작에 사라졌다. 최악의 상황을 피하려고 온몸을 긴장시키고 고군분투하는 사이 식은땀이 흐른다. 그리고 곡예비행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나스카라인의 그림들은 도마뱀, 벌새, 원숭이등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표현들이다. 그러나 기원전 300년경에 만들어졌다고 보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크고 정확하다. 제작자가 인류든 외계인이든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을 때는 의도하는 바가 있지 않았을까? 뭔가를 알리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지나치게 이른 시기에 등장한 천재 예술가가 인류의 호기심을 자아낼 꺼리를 만들어주고 싶어 이런 그림을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하루 종일 고원을 누비며 작업에 몰두하고 난 후 피곤한 몸으로 잠자리에 들어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그 예술가는 괴짜이면서 천재였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펼칠 기회가 없음을 아쉬워하다가, 오래도록 후세 인류가 궁금해할 수수께끼를 남겨두고 싶었던 것이다.
나스카 라인 투어가 나에게 남겨준 상상이다.
비행기에서 내려서도 한참만에야 정신을 수습하고 파라카스로 향했다.
해안을 따라 줄지어 선 마을 가게에서는 음식과 기념품을 판다. 해안가에는 조그만 보트들이 떠 있다. 해맑은 얼굴의 아이들이 맨발로 해변을 달리고 몸매 예쁜 여인은 배를 깔고 엎드려 바다를 본다.
이곳은 파도가 모래를 밀고 올라오지 못한다. 해조류가 모래사장과 바다 사이에 풀밭처럼 퍼져 있어서다. 그래도 파라솔 아래에서는 태양을 즐기고 개들도 신이 나서 바다에 뛰어든다. 노점상들의 호객도 흥겹다.
크지 않은 해변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다 지쳐 카페에 들어갔다. 시원한 망고 주스 한잔으로 행복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