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사이와만, 오얀따이땀보
스페인군에 의해 잉카의 황제(아타우알파)가 처형되고, 꼭두각시 황제로 추대된 망코 잉카는 스페인인들의 횡포를 겪으며 침략자들의 본모습을 알게 된다. 그는 그들로부터 탈출해서 흩어진 잉카 군을 모은다. 망코의 부름에 응한 잉카 군은 수십만에 달했다. 잉카 군은 쿠스코 일대로 몰려들었다. 쿠스코와 주변 언덕은 망코의 잉카 군으로 뒤덮였다.
삭사이와만은 쿠스코 북쪽 언덕 위의 요새지로 잉카 군의 후방 전략 사령부이자 군수품 보급기지였다. 잉카 군은 이 요새를 근거지로 쿠스코 중심부를 공격했다. 당시 쿠스코 중심지에는 200명 정도의 스페인군과 잉카정권에 반대하며 스페인군을 돕는 원주민들이 있었다고 한다.
삭사이와만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남쪽으로는 가파른 경사면 아래로 쿠스코 시내가 내려다보이고, 북쪽에는 넓은 평지가 있다.
잉카 군의 지속적 공격으로 쿠스코 중심부에 고립되어 위기에 처한 스페인군은 삭사이와만을 차지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일한 해결책이라 생각했다.
'에르난도(피사로의 형제 중 한 사람)는 우리가 요새(삭사이와만)를 점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가장 심각한 타격을 주는 공격이 그곳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연대기 기록자 페드로의 회상)
스페인 군은 쿠스코를 에워싼 잉카 군을 뚫고 나와 이 요새를 공격했다. 잉카 군은 두 가지 전략적 실책 때문에 스페인군에게 이 난공불락의 요새를 빼앗긴다.
스페인군이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 일부 병력이 포위망을 뚫고 나오자 잉카 군은 그들이 도망친다고 생각하고 도주로 봉쇄만을 고려한 탓에 스페인 군은 요새의 북쪽 평지를 쉽게 차지했다. 기마대가 주력인 스페인 군에게는 전투에 유리한 평지 확보가 중요했다.
평지로부터의 공격도 쉬운 것은 아니었다. 요새의 북쪽 방어벽은 거대한 돌로 6~7m 높이의 석축을 쌓아 올렸다. 장벽의 길이는 300m가 넘고, 가장 큰 돌은 200톤에 달하며 엄청난 크기의 방어벽 세 개가 높이 솟아 있다. 이 벽들은 지그재그로 세워져 있고, 입구 통로는 좁게 만들어 적들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것을 막는다.
거대한 방어벽을 사이에 두고 잉카 군과 스페인 군의 치열한 공방이 계속되는 가운데 스페인군에서는 희생자가 속출했다. 고전 중이던 스페인군은 야간기습을 계획한다. 잉카인들이 밤에 싸우는 것을 싫어하며 특히 초승달이 뜨는 밤을 꺼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달빛 흐린 어둠 속에서 스페인 군은 요새의 가장 어두운 곳을 찾아 사다리를 세운 다음 첫 번째 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잉카 군은 습관에 젖어 밤의 기습에 대비하지 않았다. 낯선 적들을 자신들의 관습으로 맞은 것이다. 예기치 않은 갑작스러운 공격을 당한 잉카 군이 대오를 정비할 틈도 없이 두 개의 장벽은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세 번째 장벽을 사이에 두고 양 편의 공방이 쉬지 않고 계속되었으나 잉카 군은 밀리며 세 개의 탑 꼭대기로 후퇴한다. 동이 틀 무렵 잉카 군의 공격은 약해지기 시작했다. 창고를 꽉 채우고 있던 돌과 화살이 바닥이 났기 때문이다. 무너진 잉카 군의 마지막 지휘자는 '사자처럼 달려들어 적에게 칼과 방패를 휘두르며' 저항하다가 탑이 스페인군에게 점령되자 머리와 얼굴을 망토로 가리고 탑에서 몸을 던졌다고 한다(연대기 기록자 페드로의 회상)
물론 잉카군 패배의 근본적인 이유는 스페인군이 철제 무기와 기마대라는 압도적 우위의 공격 수단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스페인군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었던 키소 유판키 장군의 예를 보면 삭사이와만의 패배는 안타깝다. 유판키 장군은 안데스의 가파른 지형을 이용하여 스페인군의 기마대를 무력화시켰던 것이다.
요새의 북쪽 석벽 앞에 서서 바라보면, 거대한 돌의 육중한 무게감이 느껴지며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요새는 무너졌고 잉카인 수천 명의 피가 곳곳에 스며들었다. 이 비극적인 역사는 페루인들에게 어떤 의미로 각인되어 있을까? 지금 이곳에는 호기심 어린 사람들의 발길이 오가고, 잉카인들을 지키던 거대한 돌들은 의연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요새의 정상부로 올라가면 태양의 신전 기초석이 남아있다. 붕괴되었다면 주변에 흩어져 있을 잔해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 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해설자는 질문을 던진 후 극적효과를 기대하는 듯 우리를 쳐다본다.
태양의 신전은 피사로에 의해 헐어지고 그 석재는 쿠스코로 옮겨져 아르마스광장에 있는 성당건축에 사용되었다. 잉카인들이 태양신에 대한 믿음으로 정성을 다해 다듬었던 돌들. 태양 가까운 산 정상에서 태양을 향해 웅장하게 서있던 신전의 돌들은 이유도 모른 채 끌려 내려와 이방의 신을 섬기는 신전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신전을 찾는 이들이 잉카의 후예들이니, 이방의 신을 섬기는 그들을 원망할 것인가? 그렇게라도 자신의 백성과 만날 수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할 것인가?
신전의 돌이 제자리에 있지 않음을 슬퍼하는 후손들이 있으니 그렇게라도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삭사이와만에서 쿠스코 시내를 내려다보면 무척이나 대조적이다. 수많은 건물과 사람, 차들로 북적이는 쿠스코 시내에 비해 삭사이와만은 거대한 돌들로 이루어진 쓸쓸한 폐허다. 잉카인들이 힘을 다해 옮기고 정교하게 짜 맞추어 만든 건축물, 담, 성벽들이 이곳을 공격했던 스페인인들에 의해 파괴되고 약탈되어 쓸쓸한 돌무더기로 남은 곳. 침략자들은 그 돌을 시내로 옮겨 성당을 짓고 오늘날 쿠스코 시내의 번화함을 만들었고 이곳은 폐허로 남아 있다.
오얀타이땀보 마을에서 태양의 신전 쪽을 올려다보면 그곳은 한눈에 봐도 요새지처럼 생겼다.
공원 입구를 통과하여 가파른 경사면의 계단을 올라갔다. 여기도 석축을 쌓아 만든 계단식 경작지가 있다. 중간쯤에서 숨을 고르는 동안 유적지에 담긴 사랑이야기를 들려준다.
오얀따이장군은 사랑하는 공주를 쟁취하기 위해 10년간 황제와 전쟁을 벌였다. 그 당시에는 왕족은 왕족끼리만 결혼할 수 있어서 장군은 공주를 사랑할 자격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주에 대한 사랑을 이루고자 10여 년을 저항했던 오얀따이 장군은 결국 황제의 허락으로 사랑을 이루었다는 달콤한 이야기다.
이런 해피엔딩과는 반대되는 또 하나의 역사가 있었다.
삭사이와만 요새가 무너진 후 망코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 이곳 오얀따이땀보 요새였다. 그 정보를 입수한 스페인군은 이곳을 공격해서 망코를 죽이거나 생포해서 반란군을 잠재우려 했다. 그러나 잉카 군은 오얀따이땀보 요새의 유리한 위치를 이용하여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고, 수로를 이용하여 평원으로 물을 흘려보내 스페인 기마병을 무력화시켰다. 스페인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쿠스코로 돌아갔다.
그리고 잉카인들은 전략적인 이유로 마지막 저항지 빌카밤바를 향해 떠났다. 이곳에 울분을 남겨놓은 채.
후에 잉카제국을 장악한 스페인군은 요새 정상에 있던 태양의 신전을 파괴했다. 잉카인들이 6개의 돌을 세워 만든 거대한 석벽만이 굳건히 남아 옛 영광을 지키고 있다.
요새의 맞은편 산에는 곡식저장고가 있다. 통풍이 잘 되도록 설계하여 수년간 농산물을 보관할 수 있다는 '콜카'라는 저장고다. 그곳에 보관했다는 말린 감자를 보여준다. 만져보니 표면이 단단하고 거친 느낌인데 탁구공처럼 가볍다. 감자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이렇게 보관한 감자는 물에 불리거나 가루로 만들어 음식을 만들었다고 한다.
요새 아래 평지에는 규모가 꽤 큰 마을이 있다. 역사의 우여곡절을 겪은 마을 같지 않게 차분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다. 마을의 골목 가운데에는 잉카제국 시절 만들었던 수로에 그때처럼 맑은 물이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예부터 만들어 입고 쓰던 것들을 지금도 만들어 관광객들에게 팔고 있다.
모레이를 향해 가는 길은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완만한 산비탈에 연초록의 식물들과 노란 꽃들, 나지막한 지붕들이 어우러진 모습은 오래된 풍경인 듯 정겹다. 마치 잉카시대의 삶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모레이는 겹겹이 둥글게 감도는 모습이 노천극장을 닮았다. 이곳은 잉카제국 곳곳에 있던 계단식 경작지를 재현해 놓은 곳으로 잉카인들의 농업실험실이었다. 수천 종의 감자와 옥수수 씨앗이 이곳에서 만들어져 잉카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높은 산 계곡에 염전이 형성된 모습은 장관이다. 경사진 계곡에 구획을 만들어 소금물은 가둬 놓았는데 냉동실의 얼음틀을 연상시킨다.
이곳은 옛날 바다였던 곳이라 거대한 암염층이 형성되어 있다. 비가 오거나 눈이 녹아내리면 소금이 녹아있는 그 물을 가두어 증발시킨 후 소금을 채취했다. 한때는 유력한 두 집안이 공동경영으로 소금생산을 독점하여 'MARA'라는 상표로 판매했으나 지금은 관광지로만 이용된다. 옛날 식의 소금 생산이 비용면에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데다 관광 수입이 더 짭짤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