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가랑비가 오락가락한다. 흰 물감을 쏟은 듯한 구름더미들이 낮게 깔려 있고,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결 저 끝에는 부드럽고 낮은 능선을 그리는 산들이 호수를 감싸고 있다. 이곳은 잉카인의 신화가 시작되는 곳, 티티카카 호수다.
잉카제국의 수호신은 태양신 '인티'이며 여동생인 달의 여신 '마마키야'와 결혼했다. '인티'와 '마마키야'의 아버지는 창조주인 '비라코차'다. '비라코차'는 티티카카호수에서 출현하여 하늘과 땅,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을 돕기 위해 그들에게 농업, 의학등 문명을 전수하였으나, 인간들에게 실망하여 태평양을 건너가 버렸다고 한다.
이 설화는 후에 잉카인들이 스페인 침략자들을 '비라코차'로 오인하는 불상사를 일으킨다. 그들이 태평양 바다 쪽으로 들어왔으며 '하얀 피부에 턱수염이 난' 외양이 비라코차에 대한 묘사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티티카카호 주변 나라인 페루, 볼리비아, 칠레의 북부 지역의 주민들은 이 신화를 공유하는 문화적 공동체였으나 역사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세 나라로 흩어졌다. 티티카카 호수 근처 고대도시 티와나쿠에는 페루의 태양의 신전처럼 '태양의 문' 석조유적이 있어 태양신을 섬기는 지역임을 보여준다.
호숫가에 서서 드넓은 호수와 하늘을 가득 채운 구름을 바라보고 있으면 티티카카 호수 자체가 '비라코차'의 현현이 아닌가 싶다. 잔잔한 호수 위 하늘에서는 끊임없이 구름이 흘러가고 새로운 구름이 밀려오고 흐릿해졌다가 사라진다. 구름사이 푸른 하늘은 드러났다 사라지고 밝은 태양이 얼굴을 드러낼 듯하다가 다시 구름바닷속에 숨어버린다. 시시각각 변하는 호수의 풍경은 하늘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의 연주인 듯 빠르게, 느리게 쉼 없이 변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전통적으로 ‘토토라’라는 갈대로 만든 배를 사용했다. '토토라'는 파피루스보다 더 가볍고 질긴 식물이라는데 얼핏 보면 볏짚처럼 생겼으나 훨씬 더 굵다. 단면을 보니 여러 개의 크고 작은 구멍이 있고 눌러보면 폭신폭신한 탄력이 느껴진다. 대가 큰 것은 지름이 1cm 가까이 되는 것도 있다. 한때는 이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모로코까지 항해했다고 한다.
비가 부슬거리는 호수로 배를 타고 나갔다. 토토라를 엮어 전통 배 모양을 재현해서 운치가 있다. 선수와 선미가 우아하게 곡선을 그리며 굽이치고 뱃머리는 동물 머리로 장식했다. 부슬거리던 비도 멎고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온다.
그러나 바람과 사람의 힘에만 의존하기에는 현대인들이 너무 성급하니 모터를 돌려 배를 운행한다. 내가 탄 배는 모터 소리에 제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나 건너편 배를 바라보면서 옛 정취에 젖어본다.
호수 근처 허름한 창고 건물에서는 알파카 털로 만든 옷이나 숄, 머플러 같은 소품들을 팔고 있다. 창고 한켠에서는 한 여인이 전통기구를 사용해 옷감 짜는 것을 시연하고 있다. 그 여인은 문양의 독특함과 아름다움, 상징하는 동물들이 의미하는 바를 자신의 언어로 열심히 설명하는데 그 진지함이 감동적이다. 옷감 짜는 기구는 베틀 원리와 비슷하나 좀 더 단순하고 단출한 크기다. 여인은 씨실과 날실의 위치를 정교하게 조정하고 무늬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설명을 쏟아내는데, 통역하는 사람은 미처 따라가지 못해 간략히 설명하며 "... 기계로 만든 것과는 절대 비교할 수 없다고 합니다"하며 마무리한다.
그 분위기만으로도 여인이 짜는 옷감에 대한 자부심과 예술혼 마저 느껴진다. 그에 더해 기계화된 비슷한 물건들의 경박하고 의미 없음에 대한 분노까지도. 이 창고에서는 전통과 실용성의 한판 싸움이 여인의 거친 손끝에서 전통의 승리로 기울고 있었다.
여인의 열정에 감동한 나는 그곳에서 폭신폭신하고 전통 문양이 있는 머플러를 샀다. 칠레 이후에는 인디언 문화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으니 다행히 적시에 쇼핑을 한 셈이다.
호수 주변의 농촌 풍경은, 자연 상태의 목초지가 많고 여기저기 소들이 흩어져 있다. 소들의 숫자도 많지 않아 목초를 다툴 일이 없는 듯 느긋하게 풀을 뜯는다. 울타리도 보이지 않는다. 자연도 동물도 자유롭다. 인간의 손길이 닿기 전 그러했듯이 저들의 모습은 참 평화롭게 보인다.
저 멀리 산 위에 구름더미가 쌓이며 색이 짙어진다. 다시 비가 오려나보다. 이곳 날씨는 변덕스럽다. 버스가 달리는 동안 비가 오다가 햇빛이 비추기를 반복한다. 도중의 한 도로 양 옆에는 우박 조각들이 눈처럼 소복이 쌓여 있는 광경에 놀라기도 하고, 좀 더 지나니 어떤 곳은 비가 얼마나 쏟아졌는지 도로 위 찰랑이는 물 위를 차가 달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