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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인들의 우울한 도시, 라파스

by 장성순


달의 계곡 / 3월 1일

밤비행기를 타고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에 도착했다.

아침 8시쯤 호텔에 들어와 세수하고 침대로 직행했으나 멍한 상태로 누워 자는 둥 마는 둥 했다. 고산병은 심한 통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개운하지도 않은, 감각 자체가 둔감해지는 상태다. 멍하고 흐릿하다. 그렇게 두 시간 남짓 휴식을 취한 후 12시 30분 일어났다.


호텔 창 밖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다. 8층에서 내려다보는 비 내리는 거리의 일상은 우리네와 다름없이 차분하고 조용하다. 비가 오는데도 아무도 우산을 쓰지 않았다. 부슬거리며 내리던 비가 슬그머니 사라질 거란 확신을 가진 사람들처럼 태연히 비를 맞으며 걷는다. 뿌연 하늘 저편에 햇살이 조금씩 보인다. 비가 개이려나 보다. 호텔 옆을 흘러가는 물은 마추픽추의 계곡물처럼 황토색이다.


남미 여행 일주일이 지나자 계속 쏟아져 들어오는 낯선 음식에 내 위장이 슬슬 거부감을 보이기 시작한다. 맛에 둔감한 나는 어떤 음식이든 삼킬 수 있을만한 조건이건만 낯선 음식을 만나면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 퇴짜를 놓는다. 어렸을 때 편식하던 기질이 발현되는 순간이다. 나이가 들면서 미각과 후각이 둔해지며 웬만한 음식은 먹을 수 있게 되자 편식이 극복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낯설음의 정도가 심해지면 옛 버릇이 본색을 드러낸다.

점심식사는 수프와 스테이크, 후식 팬케이크와 아이스크림이다. 익숙한 맛이다. 내 입맛 기준에 맞다. 모두 맛있게 먹었다. 이 단순함이라니. 나는 한국음식이 아니라 익숙한 맛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거다.


오후에는 달의 계곡으로 갔다. 이곳은 우주인 닐 암스트롱이 와서 보고 '달의 지형을 닮았다'라고 해서 붙은 지명이라고 한다. 달에 갔다 온 사람의 증언이니 그러려니 싶기도 하고, 처음 보는 순간 그 특이한 느낌이 외계의 지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한참 돌아다니며 찬찬히 둘러보면 점차 생소함이 사라지면서 외계의 지형이라기보다는 '지질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될만한 특이한 지형'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 지형이 눈에 익숙한 진흙 혹은 점토질로 되어있어서이다. 그래서 달의 지형이라기보다는 진흙계곡에 엄청난 소낙비가 쏟아지면서 진흙이 쓸려내려 가고 수많은 진흙기둥이 만들어진 지형 같다. 지금은 바싹 말라 선인장이 자라고 흙기둥 꼭대기에는 말라붙은 이끼류가 얹혀있다. 다만 달에 갔다 온 사람이 '달의 지형을 닮았다'고 하니 이 풍경을 보면서 달의 지형을 상상해 본다.

IMG_5753-2.JPG 달의 계곡 표지판


달의계곡 파노.jpg 건조한 지형 때문인지 선인장이 자라고 흙기둥 위에 모자처럼 얹힌 이끼들은 말라있다.



IMG_5711.JPG 솟은 흙기둥의 높이만큼 계곡도 깊다.



IMG_5731.JPG 흙기둥을 가까이에서 보면 비에 씻긴 흔적이 보이고 침식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라파스 시티투어

페루와 볼리비아는 잉카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래서인지 볼리비아에서는 페루와 비슷한 정서가 느껴지는데, 볼리비아가 좀 더 투박하고 향토적인 느낌이 강하다. 쿠스코에서 본 12 각돌이나 삭사이와만 같은 거대한 잉카문화의 흔적은 만나볼 수 없었지만, 거리를 다니며 만나는 사람들과 주변 환경은 훨씬 더 잉카적인 분위기가 풍긴다.


볼리비아는 한때 '알토 페루'라고 불리기도 했으나 스페인과의 독립 전쟁과정에서 페루와 분리되었다. 그리 독립영웅 시몬 볼리바르를 기념하여 '볼리비아'로 국호를 정했다.

남미의 독립전쟁을 크게 둘로 나누면, 하나는 스페인 침략에 항거한 원주민 인디오의 전쟁으로 망코 잉카나 투팍 아마루 2세가 있다. 다른 하나는 남미에 이주, 정착한 스페인 인들이 스페인 본국의 간섭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을 한 것으로 산 마르틴과 시몬 볼리바르가 대표적이다.

남미 곳곳에는 산 마르틴과 시몬 볼리바르를 기리는 기념물, 기마상들이 참 많다. 그에 비해 잉카의 항전 흔적은 폐허 속에서나 남아있을 뿐이다. 남미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계층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어떠한지 짐작케 해 준다.


라파스에서는 케이블카가 주요 이동수단이다.

라파스 시내를 꽉 채우고도 넘쳐나는 집들이 산비탈을 타고 위로 위로 올라간다. 도시가 팽창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산꼭대기까지 뻗어 나가며 경사가 가파른 산등성이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달동네를 형성하고 있다. 달의 계곡에서 본 것과 같은 점토 절벽 틈새에도 집들이 불안하게 박혀있다. 이 산꼭대기 동네를 연결하기 위해 여러 개 노선의 케이블카가 운행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지하철인 셈이다.


IMG_5756 복사.jpg 케이블카 노선도. 왼쪽 아래 노선별 색깔이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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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5755.JPG 케이블카 중앙역



IMG_5758.JPG 엘알토 전망대의 해발고도(4095m)가 표시되어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엘알토 전망대를 갔다.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본 동네 골목은 대부분 좁은 길과 가파른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침식이 진행되는 점토질 경사에도 허름한 집이 위태롭게 서있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다. 실제 붕괴 위험이 있으나 주택난이 심각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거주한다. 남미 최빈국 볼리비아의 민낯이다. 이런 곳은 상수도 시설도 없는 경우가 많아 옥상에 물탱크를 설치한 집들이 많다. 그래서 물조차 아껴가며 쓴다.

그 가난하고 작은 집은 벽과 지붕에 알록달록 색을 입혀 예쁘게 꾸며져 있다. 거친 삶 속에 가꾸어진 소박한 예술작품이라 더욱 포근하고 정답게 느껴진다.


볼리비아는 과거 잉카제국의 한 부분을 차지하여 문화를 발전시켰고 막대한 량의 은을 보유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침탈과 정치적 불안정 때문에 지금은 남미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칠레와의 전쟁에 패해 태평양으로 나가는 해안지대를 빼앗겨 해양 루트를 잃어버렸고 브라질, 파라과이 등의 주변국과의 다툼에서도 많은 땅을 빼앗겼다.

라파스를 보면 그들의 험난한 역사의 굴곡이 느껴지고, 산비탈의 낡은 집처럼 불안하고 우울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잉카시대에서 걸어 나온 듯한 역사의 흔적을 담은 그들의 얼굴은 낙천적이고 쾌활하다. 그러니 우울함은 관찰자의 몫인가 보다.


케이블카를 타고 산꼭대기로 올라가면 저 멀리 만년설이 쌓인 산, 구름을 머리에 이고 있는 산들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다. 이 산들의 높이는 해발 6000M~4000M이다. 그 아래 분지에 있는 라파스 시는 해발 3600M 정도다. 대표적인 고산도시다.


IMG_5760.JPG 케이블카 너머 멀리 보이는 산은 해발고도가 6000m가 넘어 만년설이 쌓여있다.



IMG_5765.JPG 평지에 있는 라파스 시내도 해발고도가 3600m 정도다







IMG_5769-2.JPG 전통복장의 치마. 허리띠 아래 부분을 한껏 부풀려 하체를 풍만하게 강조한다.


20250301_170127.jpg 서로에게 물총을 쏘는 축제기간. 물 대신 거품이 나는 스프레이를 뿌리기도 한다.


마녀시장

늦은 저녁에 마녀시장으로 갔다. 과거에는 주술에 필요한 도구와 재료들을 팔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인디오의 전통색 짙은 옷이나 소품 등을 팔고 있어서 거리를 걷노라면 남미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여행의 초반이라 기념품을 구입할 생각이 없어 마음 편하게 아이쇼핑을 즐겼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페루와 볼리비아를 지나가고 나면 인디오 전통적인 기념품은 다시 만나기 어렵다. 이 두 나라가 잉카제국의 중심지였기 때문인지 덜 유럽화 되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후에 방문한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의 나라에서는 쿠스코나 마녀시장에서 본 것 같은 향토색 짙은 기념품은 찾기 어려웠다. 그런 종류의 기념품은 쿠스코, 마추픽추, 오얀따이땀보, 마녀시장에서 사야 한다.


마녀시장은 중심 도로 좌우에 상가들이 늘어서 있고, 사이 골목에도 드문드문 가게가 있다. 골목 안에는 이들이 즐겨 마시는 코카차를 파는 카페도 있다. 거리는 조명과 장식물, 벽화들로 꾸며져 있는데 벽화에도 인디오 문화가 담겨있다. 전통 문양의 옷과 판초, 숄, 모자, 가방이 쌓인 가게를 잉카의 여인이 지키고 앉아있는 모습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서늘한 밤공기를 느끼며 반질거리는 돌길을 걷는 것도 운치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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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시장의 가게들. 코카차를 파는카페와 가게를 지키는 잉카시대의 여인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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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시장의 벽화



시장골목 바닥은 반질거리는 오래된 돌이 깔려 있고, 위에는 장식으로 매단 조명과 우산들이 보인다.



라파즈 야경을 볼 수 있는 킬리킬리 전망대 일정은 포기했다. 피로와 고산병에 지친 일부 사람들과 호텔로 먼저 들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이곳 택시는 오후 7시까지만 영업을 한단다. 택시 기사들이 삶의 질을 위해 일찍 귀가하는 건지 범죄노출 가능성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일반인이 운영하는 미니밴을 탔다. 가는 도중 어두운 골목길로 들어선 기사가 길을 찾는지 잠시 머뭇거리는 동안 긴장하기도 했으나 여튼 무사히 호텔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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