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를 가보고 싶다는 마음을 먹은 지 수년이 지났지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한 달이라는 긴 여행 기간도 염려스러웠고 여러 나라를 다녀야 하니 먼 거리 이동이 많을 터라 멀미를 하는 나는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회가 오자 ‘일단 신청한 후 차차 알아보고 최종 결정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호기롭게 예약을 했다. 그 후 거의 6개월을 기다렸는데 불안감은 점차 기대와 설렘으로 바뀌어 갔다. 남미의 역사나 잉카제국에 대한 책도 읽으며 기대감을 키워갔다.
계절이 바뀌고 드디어 남미로 떠날 날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마음 한켠에 치워두었던 불안감이 슬금슬금 고개를 든다. 한 달 여행이라는 도전적 과제, 체력이 버텨낼 수 있을까? 취약한 위장은 한 달간의 낯선 음식을 잘 견뎌낼까? 꼭 필요한 물품은 얼마나 챙겨야 할까?
그러나 막상 출국 당일이 되자 불안감은 사라지고 나는 소풍 가는 아이가 된다. 공항버스에서 바라다보는 한강은 춤추듯 반짝이는 물결과 연한 초록의 봄기운으로 소풍 길을 배웅한다.
오후 2시 30분 비행기 탑승.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기내식이 제공된다. 환승할 LA까지는 11시간, 푹 자야 할 것 같아서 와인을 두 잔이나 마셨다.
한참을 잔 것 같다. 얼핏 잠이 깬다. 지금쯤 태평양을 건너고 있으려나? 훤하던 창밖이 마법처럼 순식간에 어둑해진다. 초저녁의 희뿜한 빛이 화면 전환처럼 거무스름해지더니 캄캄한 밤이 되어버렸다. 밝음에서 어둠으로 넘어가는 것이 이토록 빠르고 쉽게 진행되는 게 신기하다. 아마도 비행기가 해를 마주 보고 날아서인듯하다.
비행기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늘 좋다. 지구가 깨어나는 모습을 본다. 어슴푸레한 배경에 붉은 선이 지평선처럼 길게 뻗어 있다가 곧 푸른빛 하늘과 구름이 드러나고 그 사이 드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는 빛. 빛이라는 표현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밝음이 널리 퍼진다.
선잠을 깨서 도착한 LA공항은 낯설고, 커다랗고, 혼잡하다. 모바일 여권 심사 앱 MPC를 열고 세수도 못한 부스스한 얼굴을 찍어 등록하고 줄을 섰다.
우리 팀이 선 줄 앞에는 나이 들고 근엄한 직원과 젊고 발랄한 직원의 부스로 나뉘었다. 나는 젊은 직원 쪽이었는데, 흑인들 특유의 곱슬머리를 콘로우 스타일로 말끔하게 땋았고 얼굴도 밤톨처럼 단정하다. 옆에 앉은 선배를 흉내 내듯 과장된 거만함으로 의자에 기대앉아 점잖은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러나 심사가 시작되자 숨겨 놓은 장난기와 유쾌함이 본색을 드러낸다. 내 여권을 보더니 ‘삼성? 성순?’을 반복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심각한 표정이더니 곧 생글거리는 표정이 된다. 마치 첫 업무를 맡아 신나는 마음을 꾹꾹 눌러 참고 있다가 한국 기업과 한국 방문객의 공통점을 찾아낸 자신이 대견한 듯 눈을 맞추며 동의를 구한다.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공통점이라 픽 웃고 만다. "Have a good day~!".하며 활짝 웃는 모습이 소년처럼 신선하다.
잠시 대기후 리마행 비행기 탑승. LA 시간 기준 11시 20분 출발.
지평선이 대각선으로 기울며 비행기의 고도가 올라간다. 순식간에 구름더미를 뚫고 올라오니 하얗고 몽글몽글한 예쁜 구름바다가 눈아래 펼쳐진다. 잠시 머물렀던 아래 세상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구름바다 위에는 또 하나의 하늘이 있다. 파란 바탕에 모시조각처럼 얇은 구름이 한가하게 떠 있으니 깨끗이 쓸어놓은 절마당 같다.
리마행 비행기는 라탐항공이다. 우리 국적기가 아니라 여러모로 생소하다. 기내 시설은 검은색이나 짙은 갈색으로 무거운 톤이고 시트와 이불, 베개는 군용 침낭처럼 끈주머니에 넣었다.
이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샴페인과 견과류가 나온다. 이어서 식사를 위해 가져온 메뉴판이 스페인어로 되어있는 걸 보니 내가 남미로 향해 가고 있다는 게 실감 난다.
이게 아마 점심식사인 것 같다. 이제는 시계를 보지 않으면 시간감각이 흐릿하다. 창밖은 몹시 밝지만 해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질 않는다.
라탐항공의 기내식. 야채는 대부분 반쯤 익힌 채 나온다/ 샴페인과 견과류. 테이블 등 기내장식이 고전적이다.
식사가 끝나자 승무원이 돌아다니며 창문을 닫는다. 기내는 순식간에 밤이 된다. 먹었으니 자라는 건가? 대낮인데? 시차적응을 위해 자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싶어 자리를 정돈하고 잠을 청했다. 얇은 차렵이불을 덮고 잤는데 추워서 잠이 깼다. 선반에 넣어둔 오리털 잠바를 꺼내 입고 다시 누웠다.
자다 깨다 하는 동안 시간이 흘러간다. 잠시 깨서 화장실도 가고, 일어난 김에 양치도 했다. 그러고 나서도 한참을 더 잤다.
소음이 들리더니 두 번째 식사가 준비된다. 리마기준으로 맞춰놓은 시계가 9시쯤 되었다. 저녁식사인가 보다. 과일통조림, 감자칩과 샌드위치가 나왔다. 샌드위치는 내가 지금까지 먹어 본 것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바게트처럼 겉은 딱딱하고 속은 부드러운 흰 빵에, 두툼하게 썰어 오븐에 구운 호박과 가지를 넣었는데 익히는 시늉만 했는지 생야채의 식감이 그대로 살아있다. 볶은 다른 야채와 모차렐라 치즈, 소스가 들어가 있는데 덜 익힌 가지와 호박은 좀 적응하기 어려웠으나, 금방 만들었는지 따듯하고 빵이 맛있어 다 먹었다. 앞으로 만날 남미 음식에 대한 걱정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