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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탱고, 무대의 탱고

by 장성순

부에노스 아이레스 거리 풍경 / 3월 14일 금요일

어딘가 조금 고장 난 듯한 몸 상태라 조심하는 중이다. 다행히 오늘 오전은 자유시간이니 침대에서 뒹굴며 휴식으로 회복을 기대해 본다. 12시쯤에야 일어나 점심 먹으러 출발, 가까운 거리라 걸어서 갔다.


남미 대도시의 일상을 본다. 거리를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이나 캐리어를 끌고 지하철을 향하는 관광객들은 모두 유럽인 혹은 아시아인들이며 원주민 인디오의 자취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페루와 볼리비아를 지나온 이후로는 줄곧 그랬다. 메스티소처럼 보이는 사람도 유럽인의 특징이 강하다. 안데스 산맥 동쪽지역에는 인디언들이 별로 살지 않았나 보다.


12시인데도 큰 건물사이 골목길은 그늘이 서늘하다. 거리는 서울 어느 곳이라 해도 믿을 만큼 현대적 건물과 시설이 즐비하지만 가끔 고풍스러운 식민지 시대 풍의 건물이 갑자기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질적이지 않고 서로 잘 어우러져 자연스럽다.

맞은편 좁은 인도에 검은 쓰레기봉투들이 쌓여 있다. 그 사이에 허연 사람다리 두 개가 비죽히 나와 있다. 섬찟하다. 유심히 보니 상반신은 검은 봉투에 가려진 채 거리에서 잠든 노숙자였다.

낮 12시에 거리에서 잠든 노숙자. 지나가는 사람들도 한번 힐끗 쳐다보고 별일 아니라는 듯 그냥 지나간다. 지구 어디서나 고달픈 삶은 있으나 표현되는 방식은 조금씩 다른가보다. 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며 다니는 사람이 많은 것도 낯선 풍경이다.


점심은 얇고 부드러운 쇠고기 위에 토핑을 얹은 피자다. 독특하고 맛도 좋은 편이었으나 고장 난 나의 위장을 위해 조금만 먹었다. 레모네이드는 라임을 갈아 만들어서 초록색이다. 맛있어 보이는 색깔은 아니었으나 그로기상태의 위장이 살아날까 싶은 마음에 그 신 음료를 두 잔이나 마셨다.




5월 광장(마요광장)과 핑크하우스

5월 광장(마요광장)은 정치적인 상징들로 넘쳐난다.

대부분의 남미 국가들은 유럽 본국(스페인이나 포르투갈)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투쟁의 과정을 거쳤다. 그래서 독립 투쟁을 기리는 기념탑이나 독립전쟁을 이끈 영웅들의 동상 등이 많다.

아르헨티나 또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투쟁의 과정을 거쳤다. 독립은 1810년 5월, 본국에서 파견된 통치자를 축출하고 독자적인 지방정부를 수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를 5월 혁명이라 하며 '피라미드 데 마요'가 높이 솟아 이를 기념하고 있다.


5월 혁명 기념탑( 피라미드 데 마요)


5월 광장 주변 모습


광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대통령궁 핑크하우스다. 귀여운 색깔에 어울리는 아기자기한 느낌의 건물이다. 예쁜 공주가 걸어 나올듯한 이 건물도 정치적 대립의 산물이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아르헨티나는 독립 후 국가의 정체를 두고 연방정부파와 중앙정부파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 두 대립정당의 화합의 상징으로 두 파의 대표색인 흰색과 빨간색을 합해 핑크색으로 칠했다고 한다.

정치적 대립을 화합으로 바꾸는 건 어느 나라에서도 쉬운 일 이 아니니 그들의 소중한 경험을 색깔로 명백히 표현해 놓고 그 경험을 되새기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리라.

5월 광장의 핑크하우스



5월 광장의 바닥에는 흰색 스카프가 여러 개 그려져 있다. 군부독재 시절(1976~1983년) 실종된 사람들의 어머니들이 만든 '5월 광장의 어머니회'를 상징하는 스카프다. 군부는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이거나 투옥하고 고문했다. 그리고 그 불법적인 행위들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희생자들의 어머니, 할머니들은 사라진 자식들을 찾기 위해 단체를 결성하고 오월광장에 모였다. 실종자를 찾으려는 과정에서 어머니들이 군부에 납치되기도 했으나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5월 혁명 기념탑을 돌며 정기적으로 시위를 하고, 실종자를 찾기 위한 노력을 이어갔다. 어머니회 사람들은 흰색 스카프를 머리에 둘러 자신들을 표시했다. 그들의 눈물을 적셨던 스카프는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오월광장의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오월광장을 둘러보니 남미의 민주주의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 더 많은 피와 눈물과 희생을 거름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 유럽 본국에 대항해 독립투쟁을 하면서도 연결고리를 끊을 수 없고, 미국 자본의 진출과 그에 결탁한 군부독재정권을 극복해야 했으니 만만치 않은 가시밭길을 걸어온 셈이다. 물론 이 땅의 원래 주인들이 겪은 고난의 길과 현재의 궁핍한 처지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


IMG_8276-1.jpg 5월 광장의 어머니회 상징인 흰색 스카프


삼위일체 메트로 폴리탄 대성당

5월 광장의 북쪽에는 대성당이 있다. 광장을 중심으로 행정부와 성당을 배치한 것은 남미 국가들의 광장에서 흔히 보이는 구조다. 유럽문화의 영향이리라.

성당 전면에는 열주가 배치되어 장중함을 더한다. 이 성당 안에는 산마르틴 장군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산 마르틴은 아르헨티나뿐만 아니라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칠레와 페루까지 진출하여 스페인 왕당군을 물리쳤다. 그래서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의 해방자'로 불린다. 그래서 남미를 여행하는 중 여러 곳에서 그의 기념비를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시신은 고향인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이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와 함께 전장에서 활약한 척탄기마병의 복장을 갖춘 사람들이 지금도 묘소를 지키고 있다. 이 또한 전통이면서 관광상품이다. 의미 있는 것을 부각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기존사회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데 경제적 가치까지 창출한다면 일거양득이 아니겠는가.



5월 광장의 삼위일체 메트로 폴리탄 대성당



IMG_8309-1.jpg 척탄기마병 복장을 한 군인이 산마르틴의 영묘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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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산 마르틴의 유해가 안치된 곳.




성당을 둘러보다 보니 왠지 익숙한 그림 하나가 성당 벽에 걸려 있다. 치마저고리나 두루마기 같은 한복을 입거나 갓을 쓴 사람, 상투를 튼 사람까지 등장하는 걸 보니 한국사람들이 분명하다. 색동옷을 입은 아이도 있다. 이렇게 먼 나라에까지 우리나라 순교자들의 그림이 걸려있는 걸 보니 지구촌이라는 말이 여실히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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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에 걸려있는 우리나라 가톨릭 순교자 그림과 성당 내부 모습



라보카 지역으로 이동하는 중에 잠시 백화점을 들렀다. 쇼핑할만한 게 있나 싶어 돌아다녀 보니 매장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에 비해 여유 공간이나 휴게 공간, 카페등이 잘 배치되어 경제적 효율성보다는 미적 공간구성에 주력한 것처럼 보인다. 상품 진열도 비슷한 맥락인 듯, 남성복 가게에는 멋진 자태의 구형 자동차가 한대 들어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쇼핑 후 카페로 가는지 상점에서 물건을 사는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백화점이 유지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나 또한 보태주지는 못하고 곳곳에 있는 벽화사진만 찍었다.

백화점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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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가 전시 된 백화점 내의 남성복 가게 / 그림으로 장식된 백화점 천장



이동 중 잠시 차에서 내려 '여인의 다리'를 감상했다. 배가 드나들 수 있도록 설계된 다리라고 한다. 날렵하게 쭉 뻗은 하얀 선이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갖고 있기는 하나 다리 이름치고는 이색적이다. 슬픈 사연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할 이름이 아닌가 싶다.


여인의 다리



라보카에서 만난 거리의 탱고

대서양에 인접한 라보카 지구는 초기 정착민들의 마을이며, 후에는 가난한 부두노동자들이 살았다고 한다. 집들이 대체로 초라하고 낡았지만 벽을 밝은 원색으로 칠하고 깃발이나 인형으로 장식하여 생동감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거리와 골목에는 음식점과 상가가 줄지어 있고, 건물 2층에서는 개성 있는 인형들이 창문이나 테라스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거리에는 탱고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무희 몇 명이 탱고 복장을 갖추어 입고 탱고를 추며 관광객을 유혹한다. 어설픈 관광객의 춤동작을 받아주며 춤추는 장면을 연출하고 사진을 찍도록 해준다.

거리의 소음 속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추는 그들의 모습은 사뭇 진지하다. 자신의 손을 잡으면 탱고를 출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그리고 상대방의 춤이 여의치 않으면 혼자 흥에 겨운 탱고를 춘다. 추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 모두 얼굴에 웃음이 가득이다. 그들의 흥겨운 모습에 나도 춤을 출 수 있으면 좀 더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본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창문이나 테라스에 있는 인형들은 체형과 표정이 다양하고 개성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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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보카 지구 건물 벽은 밝은 원색으로 칠해 생동감이 느껴진다.




라보카 지역의 벽화와 조각품. 첫 번째 조각은 닻을 들고 있는 부두노동자로 이 지역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골목에도 카페에도 사람들이 북적인다. 좁은 골목 안으로 빼곡히 들어찬 가게들은 비교적 싼 기념품이나 티셔츠를 파는데 하늘색 줄무늬의 아르헨티나 축구 유니폼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띈다. 한 가게의 위층 벽면에 커다란 메시의 사진이 프린팅 되어 있다. 월드컵 우승컵을 든 장면이다.

동네 한 귀퉁이에 풋살경기장 규모의 작은 운동장이 있는데 어린 소년 두 명이 코치에게 축구 지도를 받으며 훈련에 열중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축구의 나라라는 게 실감 난다. 호텔이나 식당에 켜진 TV에서는 거의 항상 축구경기가 방송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허름한 골목에서도 제2의 메시를 꿈꾸는 아이들이 축구공을 날리는 곳이다


벽을 장식한 월드컵 우승컵을 든 메시 사진


축구의 나라 아르헨티나. 벽화의 얼굴은 마라도나를 떠올리게 한다



개인주의적인 나무? 전체적으로 단풍이 들지 않고 몇몇 잎사귀만 먼저 빨갛게 물들었다!



무대의 탱고

저녁 일정은 탱고 디너쇼. 탱고를 잘 알지도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는 데다 컨디션도 별로라 지루한 시간이 될 것 같았다. 공연을 보러 간 극장 건물은 오페라 극장과 비슷해서 우아한 분위기다. 실내에는 무대를 향한 긴 테이블이 여러 개 놓여있고 붉은 막이 쳐진 무대는 근사한 공연이 있을 듯한 기대를 갖게 한다. 공연 시작 전에 식사를 했다. 와인과 맥주가 무제한으로 제공되었으나 안타깝게도 나는 속탈이 나서 스프라이트만 마셨다.

극장 입구와 내부의 무대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었다. 강렬한 음악과 함께 화려한 옷을 입은 무희들이 옆문으로 들어와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며 춤을 추니 분위기가 순식간에 고조된다. 이어서 무대 위에도 무용수들이 등장하고 조명이 쏟아지며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된다.


공연을 보니 탱고도 여러 종류가 있는 듯하다. 사교적인 자리에서 정장을 갖춰 입고 격식에 맞추어 추는 춤, 일상생활 속에서 즐기는 탱고, 사적인 감정을 최대한 표현한 섹시한 느낌의 탱고, 바의 무희들이 추는 탱고 등 다양한 종류의 탱고가 무대 배경과 의상을 바꾸어가며 차례로 공연되었다.

춤추는 남녀의 화려한 발동작과 골반의 움직임, 다리 접는 모습의 발랄함,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살아있는 듯한 리듬감, 닿을 듯 스쳐 지나가는 팔다리에서 느껴지는 에로틱함. 이 모든 정서들이 무대 위에서 발산되며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남자 무용수의 동작은 경박하다 싶을 정도로 가볍고 날렵하다. 그러나 꼿꼿이 세운 상체와 진지한 표정, 상대 여성을 향한 정중함이 신사의 이미지를 살려준다. 여성 무용수는 때로는 사랑스럽고 농염하게, 때로는 천진난만하고 발랄한 모습으로 자신의 감정을 맘껏 표현한다. 탱고는 강렬한 정서적 에너지를 내뿜는 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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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형태로 꾸며진 무대 , 무용수 뒤의 연주자들은 막간 연주도 한다.


각각의 무대 중간에 탱고음악 연주와 노래가 삽입되었다. 공연이 끝나갈 무렵, 2층 테라스에서 등장한 여성 독창은 화려한 고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탱고의 선명하고 강렬한 정서는, 춤과 음악에 문외한인 나조차도 공연에 흠뻑 젖어들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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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중에 등장하는 가수와 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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