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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신전, 엘 아테네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by 장성순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내에서 / 3월 15일 토요일

오늘도 오전 내내 호텔에 머물렀다. 위장의 반란이 며칠 계속되면서 편두통이 뒤따라 왔다. 나의 불행을 전해 들은 일행이 '효과 좋다고 소문난 소화제'라며 약을 나눠줬다. 점심을 먹고 난 후 내가 가지고 있던 소화제와 받은 소화제를 한꺼번에 쏟아 넣었다. 소화제의 양과 질이 달라지자 위장이 정신을 차린 건지 오후부터는 편두통이 덜해지니 오랜만에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온듯하다. 아파봐야 통증 없는 일상의 고마움을 안다.


오후에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내를 돌아다녔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교 법학부 건물은 전면에 거대한 열주를 세운 어마어마한 규모의 건물이다. 그런데 건물이 큰 도로에 접한 데다 주변에 다른 건물이나 시설이 없이 혼자 서있으니 대학 캠퍼스라기보다 관공서 같다. 근엄해 보이는 건물의 전면 한 귀퉁이에는 붉고 검은 칠을 한 낙서도 보이고, 건물을 드나드는 학생들보다 관광객이 많다. 외부에서 본모습은 이렇다.

그러나 저 건물 안 어느 교실이나 연구실에서 치열하게 공부하며 미래를 꿈꾸던 학생들이 있어 그들은 아르헨티나의 대통령들이 되었고 노벨상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건물을 보러 온다. 시간을 넘어 잠시나마 같은 공간을 공유해 보기 위해.


IMG_8464 -1.jpg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법학부 건물. 가로등이 서있는 축대 옆면에 낙서가 보인다.




법학부 건물 옆 공원에는 좀 생뚱맞은 조형물이 있다. 2002년에 만들어졌다는 거대한 금속 꽃이다. 번쩍이는 금속성으로 꽃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도 생소한데, 이 거대한 꽃은 꽃잎이 두 개쯤 떨어져 나가 이빨 빠진듯한 모습으로 꽃술을 드러내고 서 있다. 처음 제작 계획으로는 시간에 맞춰 꽃잎이 닫혔다 열렸다 하고 조명도 설치되어 장관을 펼쳐 보일 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계적 문제로 작동이 제대로 되지 않고 태풍으로 꽃잎도 떨어져 나가 버렸다. 그 크고 번쩍이는 모습은 자신을 과시하려다 실상을 들켜버린 허세 가득한 유명인을 닮았다.

IMG_8502 복사.jpg '플로랄리스 헤네리카'라는 이름의 꽃 조형물




근처에 있는 장미공원은 규모도 크고 큰 나무도 많아 시민들의 휴식처 역할을 하고 있다. 공원 잔디에는 연인들과 가족들이 한가로운 주말을 즐기고 있다. 넓은 길에서는 자전거나 보드, 인라인을 타고 질주하거나 땀 흘리며 달리는 사람들이 주말의 공원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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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서 주말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




장미 공원은 이름처럼 장미가 참 많은데 정성 들여 가꾸었다기보다 자연스러운 상태로 유지하는 게 목적인 것 같다. 가지들이 제멋대로 뻗어 나가고 훌쩍 웃자란 가지도 많다. 오래되어 줄기가 굵직한 장미 묘목도 많다.

이 공원은 한때 권력자였던 장군이 축출되면서 그의 땅을 몰수하여 만든 공원이라고 한다. 한 사람이 대도시에서 이렇게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이 놀랍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많은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도심의 쉼터가 만들어졌으니 전화위복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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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 레콜레타 공동묘지 근처에 있는 대성당을 보러 왔으나 성당 안에서는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다. 성당도 궁금하고 결혼식 광경도 보고 싶지만, 하객들로 혼잡한 와중에 불청객이 방해가 될 듯하니 들어가 구경하기가 미안해진다. 성당 외관만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IMG_8543.JPG '기둥의 성모 대성당' 외관


IMG_8549-1.JPG 성당 담에 옹기종기 매달려 밖을 내다보는 아이들. 세계 어디에서나 아이들은 참 비슷하다.



성당을 나와 잠시 고민. 다리도 쉴 겸 카페에 가서 휴식을 취할 건지 시장구경을 할 것인지.

성당 앞 공원에서는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는데 눈길을 끄는 이국적인 물건들 때문에 결국 휴식을 포기했다. 자그마한 손수레에 실린 장신구와 수공예품, 가죽제품, 그림, 옷, 도자기 그릇이나 컵 등은 그들만의 색과 무늬, 그리고 독특한 형태로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폭이 2m도 안 되는 전시공간을 최대한 활용해서 크고 작은 물건을 빼곡하게 채운 손수레 상인들이 공원 길 양쪽에 줄지어 서있다. 백개 이상 되는 작은 점포들이 늘어서 있으니 한 바퀴 돌아보는 데만도 한 시간 이상이 걸린다. 구경만 해도 재미있다. 아니, 구경만 하니까 재미있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물건을 사자고 생각하면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린다. 비슷한 여러 개의 물건을 비교하고, 받는 사람의 필요나 취향을 생각해야 하고, 가격도 따져봐야 하니까. 그래서 선물쇼핑은 나중으로 미뤄놓고 편한 마음으로 구경만 한다. 처음 보는 신기한 제품은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한참씩 고민도 하고, 물건 파는 사람들의 진지한 표정과 소풍 나온 듯 해맑은 표정도 보면서 한 바퀴를 돌았다.

IMG_8542.JPG 공원의 쓰러진 나무 받침대 중 하나는 사람이 어깨에 멘 것처럼 연출해 놓았다.



책의 신전, 엘 아테네오서점

엘 아테네오 서점의 입구는 좁고 혼잡했다. 드나드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줄을 서서 들어갈 정도다. 그러나 서점 안으로 들어가 양쪽 기둥이 끝나는 지점에 서면 마치 전혀 다른 공간으로 이동한 것 같다.

정면에는 묵직한 붉은 커튼을 늘어뜨린 오페라 무대가 보인다. 마치 극이 상연 중인 것처럼 은은한 조명과 그림을 배경으로 사람들이 차를 마시고 있다. 무대를 카페로 만들었다.

1층 정면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있고 지하층은 원형으로 천정을 뚫은 통층구조다.

위쪽을 보면, 오페라 극장으로 사용할 당시 특별석으로 사용되었던 2, 3, 4층 난간이 보인다. 난간에는 화려한 조각이 금빛으로 장식되어 있고 난간의 우아한 곡선을 따라 조명을 설치하여 서점 내부 전체를 감싸듯 비춘다. 난간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서있는 기둥들도 주두(기둥머리)를 금빛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신전 기둥을 연상시킨다.

4층 특별석과 연결된 둥근 천장에는 이름 모를 신들이 하늘에서 노닐고 있다.

3층 난간에 서서 서점 전체를 내려다보니, 이곳은 책을 파는 곳이라기보다 책을 경배하고 찬양하기 위한 신전처럼 느껴진다. 서가에 꽂힌 수많은 책들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의미 있어 보인다. 그래서인지 책값은 비싼 편이었다.


엘 아테네오 서점은 오래된 오페라 극장을 개조해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멋진 공간을 경제적 효율성을 고려하지 않고 서점으로 활용한다는 것만으로도 문화적 우수함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다. 이런 면에서 이들은 자본주의에서 출발한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어쩌면 우리보다 자본주의에 대한 종속성은 덜하다는 생각이 든다.


IMG_8574.JPG 아래쪽에 지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가 보인다


IMG_8576.JPG 무대를 개조해 카페로 만들었다



IMG_8580.JPG 서점 내부 타원형 난간에는 화려한 조각에 금색을 입혔다.


IMG_8550.JPG 서점의 천정화



서가를 둘러보다 재미있는 발견을 했다. 'FUTBOL'이라고 표시된 축구코너가 따로 있다. '스포츠 코너'가 아니라 '축구코너'라니, 축구국가 아르헨티나답다. 이곳에서도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우승컵과 함께 한 메시를 만날 수 있었다.

IMG_8560.JPG 축구 관련 책이 있는 코너. 월드컵 우승컵과 메시




출입구 가까이 신간코너로 보이는 곳에는 한강의 '채식주의자' 번역본이 전시되어 있다. 이렇게 낯선 곳에서 눈에 익숙한 책 표지를 보니 반갑다. 같은 코너에서 '미키 17'도 전시되어 있는 것이 봉준호 감독의 영향력인 듯하여 뿌듯하다. 오래전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해리포터 시리즈는 여전히 인기인지 책은 물론이고 마법지팡이를 선물세트로 팔고 있다.


IMG_8585.JPG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전시되어 있다.


IMG_8586 복사.jpg 마법지팡이 선물세트


저녁은 '수라'라는 한식당에서 먹었다. 남미식 갈비구이와 된장찌개, 겉절이와 잡채등이 밑반찬으로 나왔다. 한국에서 먹던 고춧가루 맛에 기분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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