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날의 식단표
새벽 다섯 시 반.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스무 해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들어온 습관이었다. 영양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그렇다.
세상이 잠들어 있을 때 일어나서, 세상이 깨어날 때쯤 첫 번째 일과를 마친다.
민희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11월 초, 아침 공기가 차갑게 폐를 파고들었다.
오늘부터 새로운 직장이다. 스무 해 동안 몸담았던 영양사의 세계에서 또 다른 세계로 발을 내딛는 날.
"엄마, 벌써 일어났어?"
큰딸 민지가 머리를 헝클어뜨린 채 부엌으로 나왔다.
고등학교 2학년인 민지는 요즘 대학 진로 때문에 늦게까지 공부한다며 밤늦게 잠자리에 든다.
"응, 오늘 새 직장 첫날이잖아."
"아, 맞다. 장애인시설이라고 했지? 괜찮을 것 같아?"
민희는 딸의 물음에 바로 답하지 못했다. 사실 확신이 서지 않았다. 지금까지 해온 일들과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었으니까. 공장 구내식당에서 일할 때는 몸집 좋은 아저씨들이 "오늘 반찬 뭐야? 고기 없어?"라고 농담 섞인 불평을 했고, 병원에서는 당뇨환자용, 신장환자용, 유동식으로 나뉜 치료식을 정확하게 분배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글쎄, 해봐야 알겠지 뭐."
민희는 일부러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딸들 앞에서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평소처럼 흰 블라우스에 검은 슬랙스. 스무 해 동안 변하지 않은 영양사의 유니폼 같은 차림새였다. 거울을 보니 마흔여덟의 얼굴이 조금 긴장해 보였다.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해결하고 집을 나섰다. 새 직장까지는 차로 20분 거리.
길을 가면서 민희는 지난 이틀 동안 인터넷으로 찾아본 자료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장애인거주시설. 정식 명칭은 '장애인공동생활가정'이었다. 집단시설이 아닌 일반 주택에서 소수의 장애인들이 함께 생활하는 곳. 총 12명의 거주인이 생활하고 있고, 그 중 절반은 지적장애, 절반은 발달장애라고 했다.
"지적장애와 발달장애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민희는 며칠 전부터 이런 것들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의외로 복잡했다. 지적장애는 인지능력의 제한이고, 발달장애는 그보다 넓은 개념이라고 하는데 정확히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궁금했던 것은 이들의 식사였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음식을 거부하는가. 알레르기는 있는가. 스스로 식사가 가능한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어느 정도까지인가.
병원에서 환자식을 준비할 때도 까다로웠다. 당뇨 환자는 당분 제한, 신장 환자는 나트륨 제한, 위장병 환자는 자극적인 음식 금지. 하지만 그건 의학적 기준이 명확했다. 혈당 수치가 얼마 이상이면 안 되고, 나트륨 섭취량이 하루 몇 그램을 넘으면 안 되고. 그런 식으로 정량적인 기준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떨까. 의학적 기준보다는 개인의 취향과 습관, 그리고 무엇보다 소통의 문제가 더 클 것
같았다.
신호등에서 잠시 멈춰 선 동안 민희는 핸드백에서 수첩을 꺼냈다.
어제 시설장님과 통화할 때 메모한 내용들이 있었다.
"거주인 분들 중에 특별히 주의해야 할 음식이 있나요?"
"음... 준호 씨는 생선을 절대 안 드세요. 비린내를 못 견디거든요. 그리고 영미 씨는 당뇨가 있어서 단 것을 조절해야 하고..."
하나하나 들을수록 복잡해졌다. 12명의 거주인, 12가지의 서로 다른 취향과 제약사항들.
게다가 대부분은 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표현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선생님은 20년 경력이시잖아요. 금방 적응하실 거예요."
시설장님의 말이 격려인지 부담인지 애매했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아담한 2층 건물이었다. '참사랑의 집'이라는 간판이 소박하게 걸려 있었다. 주변은 조용한 주택가였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시설'의 모습과는 달랐다. 그냥 평범한 집 같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누군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 뉴스였다.
곧 시설장님이 나타났다.
"민희 선생님, 어서 오세요!"
이정희 시설장. 50대 중반의 여성으로, 사회복지사 자격을 가지고 이곳을 15년째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온화한 미소가 인상적이었다.
"먼저 시설을 둘러보시죠. 그래야 주방도 파악하시고 일의 흐름도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1층은 거실, 주방, 식당, 그리고 사무실이 있었다. 2층에는 거주인들의 방과 직원실이 있다고 했다. 생각보다 넓었다.
주방을 보는 순간 민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설비가 생각보다 잘 갖춰져 있었다. 대형 냉장고, 업소용 가스레인지, 식기세척기까지. 병원 급식실보다는 작지만 12명분의 식사를 준비하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전임 영양사 선생님이 일주일 전에 그만두셔서... 급하게 모시게 되었어요."
"갑자기 그만두신 이유가 있나요?"
"글쎄요... 개인적인 사정이라고만 하시더라고요."
민희는 더 자세히 묻지 않았다. 첫날부터 전임자에 대해 캐묻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오늘 점심 메뉴부터 시작해 보실까요? 미리 식단표를 짜오 셨죠?"
민희는 가방에서 A4 용지를 꺼냈다. 지난 사흘 동안 고민해서 만든 이번 주 식단표였다.
병원에서 하던 방식대로 영양가를 계산하고, 칼로리를 맞추고, 나름대로 정성을 들여 만든 것이었다.
월요일 점심: 백미밥, 된장찌개(두부, 호박), 제육볶음, 시금치나물, 배추김치
"어머, 정말 자세하게 짜오 셨네요."
시설장님이 감탄했다. 그런데 그다음 말이 민희를 당황시켰다.
"그런데 거주인 분들 특성상 이대로 진행하기는 좀 어려울 수도 있어요."
"네? 어떤 부분이 문제인가요?"
"우선 제육볶음은... 준호 씨가 돼지고기를 잘 안 드세요. 식감을 싫어하거든요. 그리고 시금치나물도 대부분 거부하실 거예요. 녹색 채소를 싫어하는 분들이 많아서..."
민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영양학적으로 균형을 맞춰서 짠 식단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럼... 어떤 음식들을 좋아하시나요?"
"음... 대부분 단순한 맛을 좋아하세요. 김치찌개, 된장찌개, 계란프라이, 그런 것들요. 너무 복잡하거나 섞인 맛은 잘 안 드시거든요."
민희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20년 동안 해온 방식이 여기서는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오늘은 제가 도와드릴게요. 직접 보시면서 파악하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10시가 되자 거주인들이 하나둘씩 식당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민희는 처음으로 앞으로 자신이 돌볼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키가 크고 건장한 청년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민수예요!"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다운증후군 특유의 얼굴 형태였지만 표정이 매우 밝았다.
"새로 오신 영양사 선생님이세요. 앞으로 민수 씨 밥 해주실 거예요."
시설장님의 소개에 민수는 더욱 환하게 웃었다.
"선생님, 저 햄버거 좋아해요! 햄버거 해주실 거예요?"
민희는 잠시 당황했다. 식단표에는 햄버거 같은 것은 없었다. 영양학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음... 민수 씨, 햄버거보다는 더 몸에 좋은 음식을 해드릴게요."
민수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저는 햄버거가 좋은데..."
"민수야, 선생님이 맛있는 거 많이 해주실 거야. 기대해 봐."
시설장님이 중재했다.
그다음에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나타났다. 영미라고 소개받았다. 당뇨가 있다던 그분이었다.
인사를 건넸지만 영미는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 말을 하지 않았다.
"영미 씨는 말씀을 잘 안 하시는 편이에요. 하지만 다 알아듣고 계세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나이도 다르고, 장애의 정도도 달랐다. 어떤 분은 혼자서 자연스럽게 걸어 나왔고, 어떤 분은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어떤 분은 활발하게 말을 걸어왔고, 어떤 분은 조용히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민희는 이들을 바라보며 새로운 긴장감을 느꼈다. 이 사람들의 식사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과 함께, 동시에 이들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 알고 싶다는 호기심도 생겨났다.
"자, 그럼 오늘 점심 준비를 시작해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