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날의 식단표
시설장님의 말에 민희는 주방으로 향했다. 오늘은 관찰하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준비한 식단표는 일단 접어두고, 이들이 실제로 어떻게 식사하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각종 재료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쌀, 야채, 고기, 생선... 일반 가정의 냉장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양이 12명분이라는 것만 달랐다.
"오늘은 간단하게 김치찌개와 밥, 그리고 계란프라이 정도로 해보시죠."
시설장님의 제안이었다. 민희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영양적으로..."
"처음에는 단순하게 시작하시는 게 좋아요. 이분들은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 시간이 좀 필요하거든요."
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론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실감했다.
김치찌개를 끓이기 시작했다. 김치를 볶고, 물을 붓고, 돼지고기를 넣고... 지극히 평범한 과정이었다.
하지만 12명분의 양을 맞추는 것은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병원에서는 수십 명분을 한 번에 만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계산이 쉬웠는데,
12명분은 미묘하게 애매한 양이었다.
계란프라이를 부치면서 민희는 문득 궁금해졌다.
이들은 계란프라이를 어떻게 먹을까? 완숙을 좋아할까, 반숙을 좋아할까? 혹시 계란을 아예 못 먹는 사람은 없을까?
"선생님, 냄새 좋네요!"
어느새 민수가 주방 입구에 나타났다.
"민수야, 부엌에는 들어오면 안 돼."
시설장님이 말렸지만 민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코를 킁킁거렸다.
"저 냄새 알아요! 엄마가 해주던 냄새예요!"
순간 민희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저 평범한 김치찌개 냄새일 뿐인데, 이 사람에게는 엄마의 기억이 담긴 냄새였다.
"민수 씨, 맛있게 끓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네! 저 많이 먹을 거예요!"
민수는 해맑게 웃으며 식당으로 돌아갔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12명의 거주인들이 각자의 자리에 앉았고, 민희는 처음으로 이들의 식사 모습을 지켜봤다.
대부분은 스스로 숟가락을 들고 식사를 했다. 하지만 그 속도와 방식은 제각각이었다. 어떤 분은 빠르게 먹었고, 어떤 분은 매우 천천히 한 숟가락씩 떠먹었다. 어떤 분은 김치찌개와 밥을 따로 먹었고, 어떤 분은 모든 것을 섞어서 먹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모두가 조용히 식사한다는 점이었다.
공장 구내식당에서는 항상 시끄러웠다. 아저씨들이 큰 소리로 떠들면서 먹었다.
병원에서는 환자들 대부분이 개별적으로 병실에서 식사를 했기 때문에 이런 모습을 볼 기회가 없었다.
"잘 드시고 있죠?"
시설장님이 민희에게 속삭였다.
"네, 생각보다 다들 잘 드시는 것 같아요."
"김치찌개를 안 좋아하는 분이 없어서 다행이에요. 가끔 새로운 메뉴를 하면 아예 안 드시는 분들도 있거든요."
식사를 다 마친 민수가 일어나서 그릇을 가져왔다.
"선생님, 정말 맛있었어요! 내일은 뭐 해주실 거예요?"
"내일은... 음, 뭘 드시고 싶으세요?"
"저는 짜장면 좋아해요! 짜장면 해주실 거예요?"
또다시 민희는 당황했다. 짜장면이라... 12명분의 짜장면을 만들 수 있을까?
"민수야, 선생님을 너무 귀찮게 하면 안 돼."
시설장님이 중재했지만, 민희는 민수의 기대에 찬 눈빛을 보며 생각했다. 영양도 중요하지만, 이 사람이 음식을 통해 느끼는 기쁨도 중요하지 않을까?
"짜장면... 한 번 생각해 볼게요."
민수는 환하게 웃었다.
"정말요? 와아, 고마워요!"
식사를 마치고 정리를 하면서 민희는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오늘 하루만으로도 많은 것을 느꼈다. 이들은 단순히 영양소를 공급받아야 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각자의 취향과 기억,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오후에는 시설장님과 함께 거주인들의 개별 특성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를 나눴다.
"준호 씨는 지적장애 1급이에요. 말을 거의 안 하시지만 감정표현은 정확해요. 좋아하는 음식을 주면 확실히 표정이 밝아지거든요."
"어떤 음식을 좋아하세요?"
"계란프라이, 소시지, 그런 단순한 것들요. 복잡한 양념이나 향신료는 못 드세요."
"영미 씨는 어떤가요?"
"영미 씨는 당뇨 때문에 식이조절이 필요해요. 하지만 단 것을 너무 좋아하셔서 가끔 몰래 사탕이나 초콜릿을 드시려고 하세요."
하나씩 들을수록 복잡해졌다. 12명 각각이 다른 존재들이었다.
지금까지는 '환자', '직장인' 같은 집단으로 생각했는데, 여기서는 '민수 씨', '영미 씨', '준호 씨'처럼 개별적인 사람으로 접근해야 했다.
"처음에는 힘드실 거예요. 저도 15년 전에 여기 왔을 때 많이 당황했어요."
시설장님의 말에 민희는 조금 위안이 되었다.
"시행착오를 겁내지 마세요. 이분들은 생각보다 관대해요. 진심으로 대하면 다 알아주시거든요."
첫날이 끝나갔다. 집으로 가는 길에 민희는 오늘 하루를 정리해 보았다.
일단 자신이 준비한 식단표는 전면 수정이 필요했다.
영양학적 완벽함보다는 거주인들의 기호와 특성을 먼저 고려해야 했다.
그리고 이들과의 소통 방법도 배워야 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알아챌 것인가. 표정으로, 행동으로, 때로는 침묵으로 전달되는 메시지들을 읽는 법을 익혀야 했다.
무엇보다 20년 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영양사'라는 직업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려야 할 것 같았다. 여기서는 단순히 영양소를 공급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들의 일상에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퇴근 후 집에 들어온 민희에게 둘째 딸 지은이가 물었다.
"엄마, 첫날 어땠어?"
"음...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어."
"어떻게?"
민희는 잠시 생각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더 어려웠지만, 동시에 더 재미있을 것 같아."
"그래? 왜?"
"거기 사는 분들이... 음식을 정말 진심으로 기다리고 좋아하시더라. 그런 걸 보니까 뭔가 보람이 있을 것 같아."
지은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행이네. 엄마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면."
그날 밤, 민희는 새로운 식단표를 짜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영양 성분표를 먼저 보지 않았다. 대신 오늘 만난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민수 씨의 밝은 웃음, 영미 씨의 조용한 식사, 준호 씨가 계란프라이를 먹을 때의 만족스러운 표정.
'내일은 뭘 해드릴까?'
민희는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는 '무엇을 만들어야 하나' 였다면, 이제는 '무엇을 해드릴까'였다. 작은 변화 같지만, 민희에게는 큰 차이였다.
새로운 식단표의 첫 번째 메뉴를 적었다.
화요일 점심: 김치볶음밥, 계란프라이, 단무지
복잡하지 않고, 대부분이 좋아할 만한 메뉴였다. 영양적으로는 완벽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들의 마음에는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민희는 수첩에 메모를 남겼다.
'첫날의 깨달음: 음식은 영양소만이 아니다. 기억이고, 감정이고, 소통의 도구다. 앞으로는 이들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자.'
창밖으로 11월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내일부터는 정말로 시작이다. 민수 씨가 기대하는 짜장면도 언젠가는 만들어주고 싶었다. 영미 씨가 당뇨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단 음식 대신, 건강하면서도 달콤한 무언가를 찾아보고 싶었다. 준호 씨가 좋아하는 단순한 맛들로 어떻게 영양 균형을 맞출지도 고민해봐야 했다.
스무 해 만에 다시 느끼는 설렘이었다.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기대감이 더 컸다. 내일 아침에도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단순히 일과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12명의 소중한 사람들을 위한 하루를 준비하는 것이다.
민희는 수첩을 덮고 잠자리에 들었다. 꿈속에서도 김치찌개 냄새를 맡으며 환하게 웃는 민수 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작은 다짐을 했다.
'이들에게 맛있는 음식뿐만 아니라 따뜻한 마음도 함께 전해주고 싶다.'
첫날이 이렇게 끝났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민희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곳에서의 하루하루가 그녀의 인생에 새로운 의미를 더해줄 것이라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