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메뉴

2. 낯선 주방, 낯선 사람들

by 윤슬

이틀째 아침. 어제보다 10분 일찍 도착했다. 첫날의 당황스러움을 만회하고 싶었다.

참사랑의 집은 아직 조용했지만, 주방에서는 이미 불이 켜져 있었다.


"어, 벌써 오셨네요?"


시설장 이정희 씨가 앞치마를 두른 채 주방에서 나왔다. 손에는 썰어놓은 양파가 담긴 볼을 들고 있었다.

민희는 순간 의아했다.


"시설장님이 직접 요리를?"

"아, 네. 여기는... 좀 특별해요." 정희 씨가 웃으며 말했다.

"큰 병원이나 공장 급식소처럼 조리사 따로, 영양사 따로 이런 게 없어요. 다들 조금씩 손을 보탭니다."

민희는 잠시 멈칫했다. 20년 동안 몸에 밴 업무 분장이 있었다.

영양사는 식단을 짜고, 영양 관리를 하고, 전체적인 급식 업무를 감독한다. 조리는 조리사의 몫이었다.

칼질이나 볶음, 국물 맞추기 같은 것들은 늘 다른 사람들이 했다.


"그럼 제가..."

"처음엔 저랑 같이 해보시죠. 어차피 12명분이니까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정희 씨는 자연스럽게 가스레인지에 팬을 올렸다. 민희는 어색하게 그 옆에 섰다.

"공장 급식소에서는 어떻게 하셨어요?"

"거기는... 조리사분들이 따로 계셨어요. 저는 주로 식단 짜고, 영양 관리하고, 검수하고... 그런 일들을요."

"아, 그러셨구나. 여기는 좀 다를 거예요."


정희 씨가 양파를 팬에 볶기 시작했다. 지글지글 소리가 났다.

"사실 저도 원래는 사회복지사예요. 조리는... 여기 와서 배운 거죠. 15년 전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는 라면도 제대로 못 끓였는데."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민희는 더욱 당황했다. 전문 조리사가 아닌 사람이 15년 동안 12명의 식사를 책임져왔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자신도...


"민희 선생님은 집에서 요리 자주 하세요?"

"음... 딸들 밥은 해줬지만, 이렇게 많은 양은..."

"괜찮아요. 양만 다를 뿐이에요."

정희 씨는 여유로웠다. 양파가 투명해지자 다진 마늘을 넣었다. 구수한 냄새가 올라왔다.


"오늘은 뭘 해드릴까요?" 민희가 물었다.

"어제 말씀하신 김치볶음밥 어때요? 거주인 분들이 볶음밥을 좋아하거든요."

김치볶음밥. 집에서는 간단한 한 끼 식사였지만, 12명분을 만든다는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김치는... 얼마나 넣어야 할까요?"

"감으로 하세요. 처음에는 적게 넣고, 나중에 더 넣으면 되니까."

감으로? 민희는 당황했다. 병원에서는 모든 것이 정량화되어 있었다.

각 메뉴의 양념까지는 아니지만 재료만은 정확한 레시피가 있었다.

"레시피 같은 건 없나요?"

"음... 딱히 없어요. 매번 거주인 분들 컨디션도 다르고, 그날그날 재료 상황도 다르거든요."

정희 씨가 김치를 꺼내면서 말했다.

"이 김치는 민수 어머니가 담가주신 거예요. 좀 짜실 수도 있으니까 조심히 간을 봐야 해요. 저번 주에는 영미 씨 어머니가 담근 김치였는데, 그건 좀 달았거든요."

민희는 깜짝 놀랐다. "거주인 분들 가족이 김치를 담가주시나요?"

"네, 가끔씩요. 어머니들이 '우리 아이가 좋아하는 김치'라며 가져다주세요. 그럼 그걸로 김치찌개도 끓이고, 볶음밥도 해드리고."

이상했다. 병원에서는 철저하게 관리된 재료만 사용했다. 위생과 안전을 위해서였다. 개인이 가져온 음식은 절대 사용하지 않았다.

"괜찮나요? 위생 검사라든지..."

"여기는 집이에요." 정희 씨가 웃었다. "병원이나 공장이 아니라 집이거든요. 가족이 만든 음식을 못 먹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죠."

민희는 말문이 막혔다. 20년 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기준들이 여기서는 맞지 않았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정희 씨가 큰 팬을 꺼냈다. 민희도 옆에서 또 다른 팬을 준비했다. 12명분을 한 번에 볶기는 어려우니 두 번에 나눠서 하자고 했다.

김치를 볶기 시작했다. 민희는 조심스럽게 뒤적였다. 집에서 두 명분 볶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양이 많으니까 저어주는 것도 힘들고, 불 조절도 어려웠다.

"너무 세게 볶으면 김치가 타요. 좀 더 부드럽게."

정희 씨의 조언에 민희는 손목에 힘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어색했다.

"처음에는 다들 그래요. 저도 몇 달은 팔이 아팠어요."

이때 거실에서 소리가 들렸다.

"냄새 좋다! 뭐 해요?"

민수였다. 어제처럼 주방 입구에 나타났다.

"김치볶음밥 하고 있어. 민수야, 거기 서 있어."

정희 씨가 익숙하게 말했다. 민수는 아쉬워하면서도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저 김치볶음밥 좋아해요!" 민수가 환하게 웃었다.

"알아, 민수가 제일 좋아하는 거."

정희 씨와 민수의 대화를 들으며 민희는 또 다른 놀라움을 느꼈다.

이들 사이에는 15년이라는 시간이 쌓아 올린 친밀감이 있었다.

단순히 시설장과 거주인의 관계가 아니라, 정말 가족 같았다.


"선생님도 김치볶음밥 잘 만드시죠?" 민수가 민희에게 물었다.

"음... 처음 해봐요. 이렇게 많이는."

"처음이요? 와, 그럼 제가 맛봐드릴까요?"

민수의 순수한 제안에 민희는 웃음이 났다. "고마워요, 민수 씨."

"민수야, 선생님 요리 방해하지 말고 텔레비전 봐."

"네~ 맛있게 해 주세요!"

민수가 돌아가자 정희 씨가 말했다.

"민수가 음식에 관심이 많아요. 가끔 주방일 도와주기도 하고요."

"거주인분이 주방일을요?"

"네.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요. 설거지라든지, 야채 다듬기라든지. 민수는 손재주가 좋거든요."

또 다른 충격이었다. 병원에서는 환자가 주방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금지였다. 위생상, 안전상 이유로.

"그런 게... 괜찮나요?"

"왜 안 괜찮죠? 여기는 이분들 집인데, 집에서 설거지 못할 이유가 있나요?"

정희 씨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민희에게는 여전히 낯선 개념이었다.

이때 또 다른 거주인이 나타났다. 어제 만났던 영미 씨였다. 말없이 주방 입구에 서서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영미야, 김치볶음밥이야. 좋아하지?"

정희 씨가 말했지만 영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영미 씨는 말씀을 잘 안 하신다고 했죠?"

"네, 하지만 표정으로 다 알 수 있어요. 지금 표정 보세요. 기대하고 있어요."

민희는 영미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확실히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영미야, 오늘은 계란프라이도 해줄까?"

영미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미소를 지었다.

"영미가 계란프라이를 제일 좋아해요. 하지만 당뇨 때문에 자주 못 해줘서..."

"그럼 오늘은 특별히 해드리죠."

민희가 말하자 영미가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작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볶음밥이 거의 다 됐을 때, 정희 씨가 말했다.

"간을 봐야 해요. 민희 선생님이 해보세요."

"제가요?"

"네, 앞으로 계속하실 일인데 익숙해지셔야죠."

민희는 조심스럽게 숟가락으로 볶음밥을 떠서 맛봤다. 짭짤하고 고소했다. 그런데 뭔가 부족한 것 같았다.

"어때요?"

"음... 좀 심심한 것 같은데요."

"그럼 뭘 더 넣을까요?"

민희는 생각했다. 병원에서라면 매뉴얼에 따라 정해진 조미료를 정량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자신이 판단해야 했다.

"참기름을 좀 더 넣으면 어떨까요?"

"좋은 생각이에요."

참기름을 조금 더 넣자 향이 확 살아났다.

"이제 한 번 더 맛봐보세요."

이번에는 훨씬 나았다. 민희는 처음으로 성취감을 느꼈다.

"잘하시네요. 센스가 있어요."

정희 씨의 칭찬에 민희는 기분이 좋아졌다.

계란프라이를 부치기 시작했다. 12개의 계란을 차례대로 부쳤다. 어떤 거주인은 완숙을, 어떤 거주인은 반숙을 좋아한다며 정희 씨가 하나하나 알려줬다.

"준호는 완전히 익힌 거, 영미는 살짝 반숙, 민수는 노른자가 터지면 안 돼요."

12명의 서로 다른 취향. 민희는 이걸 다 기억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꼈다.

"처음엔 헷갈려도 괜찮아요. 틀려도 화내는 사람 없어요. 오히려 '오늘은 다르게 해 줬네' 하고 좋아하기도 해요."

식사시간이 되자 거주인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어제보다는 민희에게 익숙해진 것 같았다.

"선생님이 만든 김치볶음밥이야." 정희 씨가 소개했다.

민수가 첫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었다. 표정을 유심히 지켜본 민희는 긴장했다.

"와! 맛있어요!" 민수가 환하게 웃었다. "이 맛이에요, 이 맛!"

다른 거주인들도 하나둘씩 숟가락을 들었다. 영미는 계란프라이를 한 입 베어 물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조용했던 준호도 평소보다 빠르게 먹고 있었다. 그의 접시가 금세 비워졌다.

"준호가 많이 먹네. 맛있나 봐." 정희 씨가 속삭였다.

민희는 뿌듯했다. 동시에 무언가 깨달았다. 여기서 중요한 건 완벽한 레시피나 정확한 영양 계산이 아니었다. 이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 만족하는 표정이었다.

점심을 마치고 설거지를 하는데, 민수가 다가왔다.

"선생님, 제가 도와드릴까요?"

"민수야, 괜찮아."

정희 씨가 말렸지만 민수는 이미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저 설거지 잘해요! 시설장님이 칭찬 많이 해주셨어요."

민희는 정희 씨를 바라봤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민수 씨가 그릇 정리해 주세요."

민수는 정말 능숙하게 그릇들을 분류해서 정리했다. 물기까지 깔끔하게 닦았다.

"민수 씨, 정말 잘하시네요."

"히히, 저 이런 거 좋아해요!"

민수의 밝은 웃음을 보며 민희는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 이들은 도움을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오후에 정희 씨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 여기 왔을 때 어떠셨어요?"

"혼란스러웠죠. 사회복지를 공부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달랐어요. 특히 요리는... 정말 막막했어요."

"그럼 어떻게?"

"하나씩 배웠어요. 실수도 많이 했고요. 처음에는 밥을 태우기도 하고, 국을 너무 짜게 하기도 하고."

민희는 자신의 첫날을 떠올렸다. 완벽한 식단표를 준비했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거주인 분들이 화내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위로해 줬어요. '괜찮다, 다음에 더 맛있게 해 달라'라고 하면서요. 그때 깨달았어요. 이분들이 얼마나 순수하고 관대한지."

정희 씨의 말에 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희 선생님은 어제 어떠셨어요?"

"당황스러웠어요. 20년 동안 해온 방식이 여기서는 통하지 않더라고요."

"당연해요. 여기는 특별한 곳이니까."

"무엇이 특별한가요?"

정희 씨는 잠시 생각했다.

"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여기는 효율성보다는 관계가 중요한 곳이에요. 완벽함보다는 따뜻함이 우선이고요."

민희는 그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병원이나 공장에서는 시스템이 사람을 움직여요. 하지만 여기서는 사람이 시스템을 만들어가죠. 매일매일 새로운 상황이 생기고, 그때그때 대응해야 해요."

"그게 더 어려운 것 같은데요."

"어려운 대신 재미있어요. 그리고 보람이 있어요."


그날 저녁, 집에서 딸들과 저녁을 먹으며 민희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엄마가 직접 요리해?"

큰딸 민지가 놀랐다.

"응. 생각보다 재미있더라."

"엄마 요리 실력으로 괜찮아?" 둘째 지은이가 농담조로 말했다.

"야, 너네 밥은 누가 했는데!"

가족들이 웃었다.

"그런데 정말 다를 것 같아. 병원이랑."

"응, 완전히 달라. 거기는... 더 인간적이야."

민희는 오늘 하루를 떠올렸다. 민수의 환한 웃음, 영미의 만족스러운 표정, 준호의 빈 그릇.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직접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들.

"엄마, 행복해 보인다."

지은이의 말에 민희는 깜짝 놀랐다.

"그래?"

"응. 뭔가... 살아있는 것 같아."

민희는 가슴이 따뜻해졌다. 스무 해 만에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새로운 도전에 대한 설렘과 두려움, 그리고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그날 밤 일기를 쓰며 민희는 생각했다.

'둘째 날의 깨달음: 여기서는 내가 영양사인 동시에 조리사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이들의 일상에 작은 기쁨을 만들어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내일은 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민희는 기대와 함께 잠들었다.

창밖으로 11월의 찬 바람이 불어왔지만, 민희의 마음은 따뜻했다. 낯선 주방,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조금씩 익숙해질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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