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은 유배가 아니잖아요

먼바다 연희에게

by 규린종희

*김 려, <사유악부> '연희'를 그리며 쓴 글을 바탕으로 구성해 본 글입니다


연희

떨어진 잎 되어 부령으로 가는 날 이 세상 어디에도 내 한 몸 받아줄 곳이 없었다오. 마른풀처럼 버석거리는 다리를 끌어 푸석푸석 빛없는 눈으로 걷고 걸었지요. 산천이 잠든 밤에도 잠들지 않아야 하는 하는 죄인의 몸. 익숙한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것이 낯선 곳으로 가는 서러움보다 더 컸다오.


한겨울 매서운 추위에 뼛속까지 어는 밤은 나도 모르게 아랫니 윗니가 부딪쳐 고드름 부러지는 소리를 냈지요. 사직을 뒤집을 중죄인들이 간다는 부령으로 가야 했던 이유는 하지 않았던 일에 연루되었기 때문이었소. 극변잔업이라... 내 나이 서른둘... 세상과 나 자신에 대한 희망으로 부풀어있던 때 마주한 절망은, 밤마다 모여 서학을 이야기한다는 유언비어 때문이었소.


나는 어려서부터 글쓰기를 좋아하고 글 읽기를 좋아했지요. 문장에 뛰어난 부친은 겨울밤 우리 형제가 경 읽는 소리를 좋아하셨소. 상상해 보시오. 발목까지 눈이 쌓인 날, 낮은 담을 넘고 마당을 지나 아버지 귀에 도착하는 두 아들의 독경소리... 잔가지 끝에 쌓인 눈이 제 무게를 못 이겨 툭 떨어지는 밤, 머리를 맞대고 눈 쌓이듯 글 읽는 형제의 그림을... 때때로 부친은 잘못된 부분을 잡아주시며 典實 의 품격을 가르쳐주셨지요. 내게는 언제나 그립고 따뜻한 풍경이라오.


유배형이 내려지고 이틀도 지나지 않아 그 춥고 험한 길에 올라야 했소. 내 울분이야 어찌 말로 다하리오. 내 혀는 이미 말할 수 없는 혀가 되었고 내 발은 움직일 수 없는 발이 되었으니, 오직 붓끝으로 통탄함을 어루만질 수밖에... 그러나 그 길에서 따뜻한 사람을 만나기도 했소. 하얀 손을 가진 한양 문생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시골 노인... 어떻게든 따뜻한 위로를 슬쩍 내려주는 그들의 온기를 안고 부령에 당도했지요.


아! 연희

그곳 부령에서 지낸 4년은 온통 그대로부터 받은 선물 같은 시간이었소. 비참한 귀양살이... 설령 억울한 옥사라 하더라도 서학쟁이 설화의 주범으로 몰린 나를 관아에서 곱게 봐줄 리가 없지요, 추위와 긴장에 쪼그라든 폐는 병을 앓아 하루에도 서너 차례 피를 토할 지경이었으니 내 처참함을 어디에다 견주겠소. 게다가 나에 대한 혹독한 감시를 늦추지 않았으니 비통함과 참담함으로 실낱같은 희망이란 말조차 가질 수가 없었소. 연희 그대를 알기 전까지는 말이오.


물기 없는 내 그렁그렁한 눈빛을 금방 탄 솜처럼 따뜻하게 받아주던 연희. 깊은 절망으로 그림자조차 짧아지던 나를 잡아준 연희. 살구꽃 얼굴을 가진 연희. 꽃피는 날이면 꽃잎을 따 내 수염에 장난을 치던 연희. 장마 끝에 뜬 달을 보러 나선 등 뒤로 가만가만 치마를 끌며 다가와 우산을 씌워주던 연희. 근심에 뒤엉킨 겨울밤 볼우물 화로에 술을 데워 나를 데워주던 연희. 술잔에 일렁이는 달빛 같은 연희. 그 달빛에 벙 그는 꽃잎 같은 연희. 문 열면 사립문에 술 들고 서 있을 것 같은 나의 연희. 내 평생을 그리워하고도 모자랄 그대 연희...


그러나 신유사옥에 다시 고초를 겪고선 남쪽바닷가 마을로 이배 되었소. 사람의 이별이란 말로 다 헤아릴 수 없으니... 그곳 차가운 땅에 그대를 남기고 떠나야 할 유배자의 간담이란... 그곳에서 4년을 지내고 다시 경상도 진동만 바닷가 마을로 이배 되어 5년을 사는 동안 나를 지켜준 것은 그대와의 아름다운 기억이라오. 연희가 내게 해준 모든 날 모든 순간의 기억은 오래오래 나를 살게 하는 이유라오.


그대 있는 부령을 떠나 남쪽 바닷가에 온 후로 나는 또 날마다 북쪽 그 바닷가를 그리워한다오. 육신의 고단함과 정신의 황폐함을 견디기 위해 날마다 일기를 썼소. 진해 바닷가 마을에 있는 동안 온통 그리운 그대 생각뿐이오. 파도에 씻긴 내 주름진 눈은 천리 밖 먼 길 그대에게 가 있으니 그리움을 시접 하여 글로 쓰듯 바닷속 생물을 글로 그렸다오. 우해에서의 어보는 내게 그리운 그대라오. 그러나 설령 유배자일 지라도 내 감정은 유배시키지 않았소.


모든 익숙했던 것들과 헤어져 생면부지의 땅에 떨어진 유배. 그럼에도 그 절망의 순간 세계를 발견하고 사랑을 만나듯, 노년이라는 언어에 감정마저 유배시키지 말았으면 합니다. 사랑은 삶의 발견입니다.

(설희. <한 낮>. 종이에 색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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