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說(야매소설)

파라다이스는 그 순간에 고여 있었다. 7

by 규린종희

남자는 폐허가 된 파라다이스로 들어갔다. 이젠 되돌릴 수 없는 그의 허니문을 가지러 간 남자가 수월할 수 있도록 주위를 경계해 주었다. 맡긴 물건을 찾으러 온 것처럼 태양의 미소라고 이름 붙인 조형물을 가지러 온 남자의 모습이 재밌다. 그런 남자를 지켜보는 나도 재밌기는 마찬가지다. 하긴 나도 신화 같은 만남을 꿈꾸었지.


땅의 온도와 눈의 온도가 같은 지점에 이르면 그제야 눈은 쌓이기 시작한다. 창호지 너머로 눈 쌓이는 소리를 보면서 눈발이 그리움의 언어라고 나는 불렀다. 초저녁부터 내린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뒷산 솔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것이 그리움의 무게라 생각했다.


한 사람을 향하여 온전히 뜨거워질 수 있는 투명한 시간이 생에 얼마나 될까. 중년에 만난 뜨거움이란 화닥화닥 데일 상처를 만들지 않는다. 두 사람만의 마음을 두 사람만의 시간에 작은 모래알처럼 슬쩍 들여앉혀도 그것이 드러나지 않아 좋다. 모래알이 부서져 먼지가 된다 하더라도, 설령 그것이 생의 마지막 사랑이 될지라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것이 중년의 연인이다. 보고 싶다는 말 하지 못해도, 아니 말하지 않아도 오고 가는 한 줄의 문장이, 하나의 단어 속에 그만큼의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퇴락한 파라다이스는 이젠 기억조차 없는 나의 허니문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내겐 가져올 기억 한 조각 없다는 것이 씁쓸하다.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 아니 살아가야 하는 사람에게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성욕 같은 감정인 외로움과 쓸쓸함은 사치다. 그래서 고독이라는 말로 포장하면서 자기 최면을 걸었다.


내가 허니문하우스를 자주 찾은 이유는 뭘까, 불러올 달달한 기억 한 조각 없는 나에 대한 위로였고, 그런 위로의 길에 신화처럼 만났던 그에 대한 희열이었다. 그러나 변치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날마다 같은 날이 아니듯 사람의 마음이야 더욱 바쁘게 변한다. 유토피아가 없듯이 어쩌면 순간순간의 기쁨을 영원으로 안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파라다이스를 가지러 온 남자가 새삼 위대한 달콤함으로 보인다.

-풀었어요. 니퍼를 가지고 오길 잘했어요


남자가 태양의 미소를 들고 나오며 말했다. 지난한 전쟁에서 얻는 전리품처럼 내게 들어 보였다. 나는 입고 있던 푸른색 패딩점퍼를 벗어 펼쳤다. 남자의 표정은 밝았다.

- 얼른 여기 넣어요. 점퍼에 싸서 일단 여기를 나가요.

- 하나 더 가지고 올 수 있는데... 가져올까요

- 무겁지 않으면 가져와요


남자는 다시 파라다이스로 사라졌다가 돌아왔다. 나의 푸른 패딩 점퍼에 감춘 남자의 눈 시린 파라다이스... 겨울 제주의 바다빛깔에 감춘 남자의 허니문을 들고 걸었다.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나는 남자의 마른 손이 걱정되어 장갑을 벗어 주었다. 남자는 그냥 맨손이 좋다고 한다. 파라아이스를 획득한 남자의 전화기가 바빠졌다. 남자는 싱글싱글거리며 sns를 하고 있다. 갖고 싶은 것을 얻고 난 뒤에 볼 수 있는 표정이다. 내가 곁에 있는 걸 잊었는가 남자는 한동안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실실 웃는다. 남자의 대상이 누구인지 관심은 가지만 관여는 하지 않았다. 그냥 멀뚱히 지켜볼 뿐...


남자가 떠나는 날이다. 일정이 남은 나는 일정을 다한 남자를 배웅하기 위해 공항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내게 남자는 허니문하우스를 안고 간다고 했다. 그가 꿈꾼 파라다이스를 다시 찾았다고...ᆢ과연 그의 말처럼 파라다이스를 찾았을까. 그가 잡은 건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이겠지. 폐허의 무심한 돌더미에서 찾은 과거의 영화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럼에도 그는 그의 퍼즐을 맞춰가고 있는 듯 보였다.


남자가 떠난 뒤. 제주엔 미세먼지로 가득했다. 공항에서 그가 잡아준 손이. 그의 손이 지나간 내 머리카락에 닿은 기억이 붉게 일어섰다. 알싸한 시간은 순간에 지나간다. 내가 인식하는 순간 이미 사라지고 없다. 파라다이스가 고인 그 순간은 어쩌면 영원으로 통하는 마지막 비상구가 될지도 모른다. 낯선 도시에서 낯선 여행자와 커피를 나누며 서로의 감성을 배려한 시간도 비상구라는 기억이 되었다.


멀리 구름이 큰 키를 세운다. 눈이라도 오려나. 검은 구름으로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아득하다. 동부일주도로를 돌아가는 버스, 함덕 김녕 월전 해변을 지나는 버스 안에서 나는 오래 쌓아두었던 기억의 기록을 지운다. 내 안에서, 내 밖에서 나를 본다. 사랑과 외로움, 기다림과 그리움에 대한 동경이 내 심상에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본다. 잘 여문 배추의 섬유질에 밴 향기처럼 제주의 겨울파도가 아삭거리며 내 머릿속을 뒹군다. 파라다이스는 그 순간에 고여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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