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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Oct 10. 2022

어쩌면 귀가

5. 1+2인 우리들

편의점에 1+1 상품이 있듯 내게는 1+2인 사람들이 있다. 하나를 사면 무려 둘이 오는 파격적인 구성, 내가 그 어느 집에 있든 항상 내 곁에 있는 사람들 말이다. 수술 뒤로 내가 가는 길에는 항상 엄마와 남동생이 1+2 상품처럼 붙어 다닌다.  


사실 원래 이 둘은 1+1 상품이었다. 발달장애가 있는 동생의 교육을 위해 엄마는 도움이 된다는 치료가 있다면 양방과 한방치료 상관없이 원주를 비롯해 서울, 인천 등 전국 곳곳을 돌아다녔다. 뭣도 모르고 사방팔방 천방지축 날뛰는 동생을 얼마나 꽉 붙잡고 다녔는지 엄마는 아직도 팔과 어깨 통증을 달고 산다. 어렸을 적부터 그 모습을 다 보고 자란 나는 자연스럽게 엄마를 더 힘들게 하지 않고 싶었다. 더는 손이 가지 않게 가방도 혼자 챙기고 숙제도 알아서 하고 밥도 잘해....먹지는 못해도 잘 사 먹었다. 동생에 대한 사랑보다는 누나라는 의무감으로 무장한 채 동생을 대했다. 이 점 때문에 엄마는 항상 내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이 엄마에게는 더 큰 죄책감으로 느껴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꽤 시간이 지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러던 내가 이번에 크게 아프면서 상황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신경이 곤두서면 곤두설수록 나도 그동안 알지 못했던 나의 어두운 성격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엄마와 남동생이었다. 나는 그동안 당연히 여기던 모든 상황에 사사건건 태클을 걸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일도 아닐 것들을 트집 잡으며 나는 지난 20여 년간을 참아왔는데 엄마는, 남동생 너는 왜 이거 하나 이해하지 못하냐고 악을 썼다.  사실 그렇게 참고 산 건 아니었는데 그냥 모든 상황이 내겐 다 억울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억울해야만 했다. 안 그러면  내게 벌어진 이 모든 일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엄마는 그동안 내게 미안했던 마음에 대해 속죄하듯 그 말들을 들어주다 몇 달 뒤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같이 말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가장 놀라웠던 건 남동생의 반응이었다. 매일 혼잣말을 중얼중얼하며 자기만의 세계에서 즐거워하던 녀석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만큼 입을 꾹 닫고선 군말 없이 내 말을 다 들어주었다. 두 집을 오가며 무거운 짐도 오롯이 동생의 몫이었다. 든든한 돌쇠와 유모, 아씨와 같은 완벽한 조합이었다. 


그런 녀석에게도 변한 상황만큼이나 새로운 낙이 생겼다. 부천 집에 대한 애정이 바로 그것이었다. 부천에서 강릉으로 내려갈 때면 “며칠 뒤에는 부천에 가지?”를 강릉에 내려와서 올라갈 때까지 수백, 수천 번을 되뇌었다. 사람들이 “부천이 좋아 강릉이 좋아?” 물으면 주저 없이 바로 부천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다 부천에 올라가는 날이면 세상 행복한 얼굴로 누구보다 제일 먼저 가는 길을 앞장섰다. 저 녀석을 위해서라도 부천에서 눌러앉아 살아야 하나 싶을 정도로 이 녀석의 부천 사랑은 대단하다. 


내게 또 다른 1+2인 사람들은 바로 무무 언니와 몽지이다. 이들은 문제의 전 직장에서 같은 인턴으로 만났다. 일면식도 없고 전공도 제각각, 나이도 다 다른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붙어 다니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공모전에 있어서 최상의 조합이었다는 데에는 아무도 이견을 달지 못할 것이다. 러시아 공모전을 하면서 우리 셋은 각자의 장점은 최대한 존중해주고 약점을 보완하는 방식을 자연스레 터득했다. 무무 언니는 특유의 친화력과 밝은 성격으로 젊음을 강조하는 프로젝트를 전달하는데 최상의 선택이었고 몽지는 디자인을, 나는 스토리텔링과 질문에 강점이 있어 무서울 게 없었다.  이상하게도 혼자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을 셋이 모이면 하고 싶은 일에 무모하리 할지만큼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았다. 


이 기세를 몰아 우리는 ‘실천좀’이라는 모임을 만들고 그동안 미뤄왔던 인생의 버킷리스트를 해나가는 중이다. 쇼핑, 독서나 영화 모임, 필름 카메라 출사. 서울 여행은 기본,  일러스트레이터로 서로의 얼굴을 그려주거나 타투 스티커를 직접 디자인해 보기도 했다. 또 소품에 관심이 많은 우리의 기호에 맞게 라탄 공예를 직접 체험해보고 사진관에 찾아가 프로필 사진을 함께 찍기도 했다. 지역 로컬 크리에이터 지원 사업 신청을 일주일 밤낮 구분 없이 매달렸던 나날도 있었다.  최근에는 평생 내가 절대 입을 일이 없으리라 여겼던 비키니를 입고선 인피니티 풀을 쏘다녔다. 모두 이들과 함께였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2020년이 되면서 실천좀 멤버들은 각각 서로 다른 지역에 살게 되었다. 나는 치료를 위해 강릉과 부천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고 무무언니는 새로운 직장을 찾아 수원과 서울을 열심히 출퇴근 중이다. 몽지는 강릉에서 굳건히 우리의 홈그라운드를 지키고 있다. 물리적으로 셋의 위치가 멀어졌을지는 몰라도 요즘과 같은 언택트 시대에 발맞추어 수시로 연락하며 마음으로는 더 가까워진 듯하다. 우리 셋에게 서로 큰 공감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 셋은 다 장기 입원을 한 적이 있을 정도로 심하게 아픈 적이 있다. 지금도 그 영향으로 조심하는 상황이지만 각자의 꿈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이다. 최근 내가 힘들었을 때도 이들은 내가 이 상황을 이겨내는데 큰 지지가  되었다. 다들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에 그들의 지지가 그 누구보다 더 마음에 와닿았다. 


언젠가 우리 셋은 강릉에서 각자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작지만 알찬 문화공간을 함께 꾸리는 날을 꿈꾼다. 자연을 벗 삼아 몽지는 흙으로 식기를 빚어내고 무무 언니가 그 그릇에 건강한 음식을 담아내면 내가 이러한 특별한 메뉴를 사람들에게 소개해주는 완벽한 조합, 이 꿈을 위해서는 1+2인 우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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