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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Oct 10. 2022

어쩌면 귀가

4. 부천에 올라오다.

그렇게 작년 여름 한 철을 병원에서 보냈다. 수술 전후로 수많은 부적합한 의료행위들이 있었고 의료진들조차 내가 이렇게 힘든 절차를 거쳐서 세부 검진과 재활을 받게 된 것에 의아해했다. 솔직히 아직도 이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감정적으로 복잡하기만 하다. 지금 이 부분을 쓰는데도 다른 때와는 달리 몇 번을 쓰는 걸 도중에 멈췄고 수없이 지웠다 다시 적었는지 모른다. 아직도 이 부분은 내게 상처인가 보다. 혹여 누군가 내 모습을 신파극처럼 곡해하지를 않기를 바라고 바랄 뿐이다.  


뭐 하나 내 생각대로 되는 것도 없고 막연해서 사는 게  참 구차하다 싶었다. 내 증상은 딱히 치료법도 없고 회복도 미지수라고 했다. 감염이나 방광에 있는 소변이 신장으로 역류해 신장이 망가지지 않게, 자율신경 이상반사증이라고 대변이 너무 찰 때 신경이 오작동해 심장과 뇌에 무리가 올 수 있으니 주의하면서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또한 감각을 소실한 부분에 상처가 생겼어도 알아차리지 못해 뒤늦게 치료하는 바람에 커다란 흉터가 곳곳에 남았다. 무엇보다 수술을 했음에도 디스크 일부가 말초신경을 누르고 있어서 다시 신경통이 심해지면 유합술을 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리고 퇴원, 강릉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또다시 주말에 지방 대형병원 응급실에 간다고 해도 그때와 다르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 병원에 과별로 진료를 받기에도 비용이나 체력적으로 소모가 컸다. 그렇게 부천 상동에 오피스텔을 얻었다. 


부천에 자리를 잡기까지는 부모님의 뜻이 컸다. 내 몸 상태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나는 생각하는 것 자체를 포기하고 그저 현실에서 도피하기를 택했던 것 같다. 온종일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게 일과라 기껏해야 인도의 어슬렁거리는 수많은  비둘기가 마뜩잖다는 게 부천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그래도 지하철이나 백화점처럼 강릉보다는 번화한 도시 모습과 주변 어딜 걸어도 허리에 무리 없는 평지와 공원들, 걷다 보면 귀여운 아기들과 앙증맞은 강아지들을 마주하면서 차츰 부천에 정을 붙이게 되었다. 


무엇보다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고 길거리에서 맘껏 울어도 되는 곳이라는 게 가장 좋았다. 당시 나는 감정의 기복이 생기면 이성적인 판단이 채 들기도 전에 먼저 눈물부터 흐르곤 했는데 이런 모습을 남에게 보이는 게 정말 신경 쓰였다. 특히 집에서 직장까지 걸어서 오 분, 그들의 뒷담화 거리가 될 것만 같았다. 병가에 이어 휴직을 냈는데도 겉보기에 사지육신 멀쩡해 보이는 애가 매일 아프다고만 하고 이유 없이 운다면 동정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비수 같은 말들, 결국 이 모든 게 나 때문이라는 말을 듣기가 너무나도 싫었다. 강릉은 우스갯소리로 학연, 지연, 혈연 빼면 남는 게 없다는 폐쇄성이 강한 도시라 이렇게 된 이상 멀쩡할 때도 찾기 힘들었던 취직은 이미 부적격자로 낙인찍혔다고 봐도 무방했다. 여러모로 부천은 내게 이 모든 걸 해결해 줄 완벽한 도피처였다. 


평생 다른 도시에서 독립하는 걸 꿈꾸곤 했는데  내 의사는 아니라도 성공도 했겠다, 버거웠던 인턴 생활에서도 탈출했겠다, 이곳에서 지내는 것이 마냥 손해 보는 일만이 아니라고 위로하곤 했다. 인생에서 잠시 그 나이대에 해야 할 절차에서 벗어나 곰곰이 생각이란 걸 해볼 때가 왔다 싶었다. 한동안 방에 누워 생각만 했다. 아는 사람도 딱히 없는 이곳에서 사색만 하고 있다 보면 찾아오는 외로움은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그래도 점차 부천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이곳에서도 나름 삶의 패턴이라는 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보통 토막잠을 자고 몸살이 온 것 같이 온몸을 두들겨 맞은 듯한 통증을 느끼며 일어나 반쯤 잠이 덜 깬 눈으로 약을 먹고도 속이 부대끼지 않을 정도만 아침을 먹어 치운다.  씻고 약을 먹은 뒤 30분마다 시작되는 치료 시간에 맞춰 승강기만 타면 바로 도착할 수 있는 한의원에서 틀어주는 가사 없는 조용한 노래를 들으며 허리 찜질, 머리, 복부, 허리 순으로 봉침과 침을 맞는다. 이어서 허리에 부황을 잠시 놓고 고주파 기계를 방광 위치에 한참 쏘이면 대략 한 시간이 지나가 있다.  


한의사 선생님은 친절하시다. 침을 맞을 때마다 항상 간단한 인사 뒤에 무료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눌 때가 있는데 강릉에 살면서 수영이나 스키를 못 타는 나를 보며 놀라시기도,  본인의 여행을 위해 요즈음 강릉 날씨가 어떤지 물어보시기도 한다. 어쩌다 내가 가끔 약속이 있다고만 해도 그 사람이 서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무무 언니인 줄 바로 기억해내시기도 한다. 그렇지만 매일 한의원에서 한 시간씩이나 가사 하나 없는 노래를 듣고 있다 보면 지루하다 못해 지난밤 못 잔 졸음이 쏟아진다. (아무래도 지브리 팬이신 듯) 어느 날은 대놓고 코를 골며 잤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원래 한의원을 하시던  한의사님이 다치시는 바람에 그보다는 젊은 한의사분이 대신 치료해주신 주가 있었는데 바로 틀어주는 노래가 아이돌 그룹으로 바뀌었다. 모처럼 흥겨운 노래에 침을 맞은 것도 잊고 둠칫 둠칫 거리다 그날 하루 침 맞은 자리가 얼얼해서 왜 원래 한의사 선생님이 그렇게 조용한 노래를 틀어주셨는지 좀 알 것 같기도 했다. 


한의원 진료가 끝나면 오피스텔로 돌아가 한두 시간 쉬다가 근처 공원으로 걸으러 나간다. 꼬마들과 멍멍이들 사이에서 한 바퀴에 삼천 보 정도, 쉬지 않고 3바퀴를 연속으로 돌고 나면 살짝 땀이 날 정도로 더워진다. 그 상태로 더위도 식힐 겸 저녁 장거리를 사러 대형 마트로 향한다. 사 먹어야 하는 생수 외에는 별다르게 무거운 것 없는 카트를 끌며 사지도 않을 이런저런 것들을 구경하고 필요한 것만 사서 집에 돌아오면  어느새 만 보는 훌쩍 넘은 지 오래, 하루가 다 가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일과를 좁은 오피스텔에서까지 엄마와 동생이 복닥거리며 대부분 곁을 지켜줬음에도 그렇게 징글맞던 사회의 소속감이 그리울 때가 있었다. 내가 봐도 이율배반적인 감정이었다. 가끔 허전함이 물밀듯이 밀려올 때면 나는 그대로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도 순식간에  아무도 나를 모른다는 자유를 만끽하곤 했다. 이곳에서는 설령  내가 생전 모르는 남자와 카페에 가서 음료를 한가로이 즐기고  있다 해도 알아보고 소문내는 이 하나 없을 것이다. 허전함은 순간이었지만 해방감은 쭉 이어졌다. 부천은 내게 이런 곳이다. 몇 번을 응급실에 실려 가고 수없이 길바닥에서 울거나 잠시 외롭더라도 결국 이겨낼 힘을 주던 곳, 그 묵묵하고도 담담한 지지에 나는 일상을 찾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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