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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Oct 04. 2022

어쩌면 귀가

3. 병상일기 - 가을

2019.09.01.일

9월이다. 어느덧 그렇게 되었다. 증상에는 변화가 없다. 다들 각자의  걱정과 삶을 남기고 있을 때 나는 그것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 여전히 기저귀를 차고서 어디 구석에 누운 채 말이다. 사표를 내기 싫었고 휴직을 조르다시피 해서 기회를 얻었다. 다음 주면 인사 담당 팀장님과 담판을 지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나는 여태껏 그래왔듯 끝없이 내 상황을 설명하는데 시간을 버려야겠지. 그게 신파가 될지, 닉 부이치치 같은 희망의 서곡 형태를 띨지는 나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동안 마비 부위의 각각 다른 증상으로 지난주만 해도 응급실에 3번 실려 갔다 왔다. 그나마 원인을 알법한 증상은 진통 처방, 알지 못하는 증상은 검사 뒤 방치 처분이 다였다. 뒤늦게 외래에 가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식은땀과 오한 증세를 말했을 때 의사 선생님은 희박하지만 자율신경 이상반사증의 가능성과 응급실에서 체온과 혈압에 변화가 없었다는 점에서 내게 정신 검사지를 남기고 갔다. 나도 안다. 감정이 이미 내가 컨트롤 가능한 수준을 벗어났다는 것을,  무의식 저편에서는 이미 남들에게 떳떳이 말하기도 민망할 이 상태가 영원할 것이라 단정 짓고 있다는 것을, 도망치고 싶다는 것을. 회사에 다닐 때 팀장님이 지나가며 한 말이 있었다. 자기는 시한폭탄을 들고 사는 것 같다고, 거기서 나는 그 시한폭탄이었다. 어중간한 시기에 근심 걱정을 대거  터트린 구 불발탄 현 탄피가 여기서 주절대고 있다. 이 모든 걸 떠안고 나는 지금 또 감염의 위협에 쩔쩔매고 있다. 한심하고 치졸하게 남아 버틴다. 삶을 꾸역꾸역 버티고 있다.



2019.09.28.토

아프지 말고 건강히만, 속 편히 살아야지 어느 정도 제 컨디션으로 돌아오니까 어느새 주위가 모두 가을이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계절은 어느덧 가을을 넘어 겨울을 향해가고 있다. 그 사실이 마냥 기꺼운 것만은 아니지만 따끈한 어묵과 붕어빵을 한 입 베어 문 순간만큼은 몽글몽글 냉한 마음도 위로받는 느낌.  순식간에 다가온 이 가을과 겨울을 반길 수도 있을 것만 같다.


내 평생을 살았다고 해도 무방한 이곳이 불과 몇 개월 사이에 답답하고 신경 곤두서는 곳이 되었다. 그립고 가보고픈 곳들은 많기도 많지만, 집 밖으로 나가기가 참 무섭다. 아는 이들을, 혹여 회사 사람들을 만날까 불안하고 초조하다. 누구 하나 실제로 뭐라 한 적 없지만 아는 이들을 마주칠 때마다 겉보기에는 멀쩡한데 엄살은 아닐까 수군거리는 듯하다. 나도 원하는 곳에서 주위 신경 안 쓰고 분위기에 맘껏 취하고 싶다. 차라리 부천에서 내려오지 말걸. 당장 내일 집 밖에 나갈 용기도, 올해 회사에서 주관하는 축제 기간을 강릉에서 견딜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근무시간을 앉아서 버틸 힘도 없는  마당에 복귀하는 것이 오히려 민폐인 걸 너무나 잘 알지만, 저 속에 내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수치스럽다. 진짜 나 쫌생이구나.



2019.09.29.일

바다를 보면 그제야 숨이 트이는 이들이 바다를 곁에 둔 이곳에서 만나 미래를 꿈꾸는 모든 상황이 저 몽환적인 강릉의 바닷빛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2019.10.12.토

이주 만에 강릉에 내려왔을 뿐인데 집에 도착하는 순간 눈물이 날 뻔했다. 정신과 약을 먹고 난 뒤로 감정의 기복이 사라진 대신 메마른 느낌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지고 울컥하니 근래 가장 큰 감정변화였다. 숨이 트이는 듯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역시 내가 진정으로 살아갈 곳은 여기구나 싶어서 더 씁쓸했다. 강릉이 부천처럼 생활이나 의료여건이 잘 갖춰졌다면 이런 괴리감도, 어쩌면 이 모든 상황도 오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수술 뒤 처음으로 나만의 자유시간도 가졌다. 짜릿한 것도 잠시 회사를 돌아가 도착한 독립서점 한낮의 바다에서 박준 시인의 시집을 사서 나오는데 다시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래도 다행히 울지 않았다. 우울함에 깊이 빠져 허우적대지도 않았다. 나는 점점 나아지고 있는 것일까. 그래야만 한다.


최근 내 마음을 가장 심란하게 한 것은 한 통의 문자였다. 무책임하게 나를 방치했고 혼란스러운 나를 겁줬던 그 A 병원 담당의가 버젓이 강릉 시내에 개인병원을 차렸다는 일종의 홍보 문자였다. 우리 집에서 걸어서 불과 10분 거리에 다음 달부터 그 의사가 진료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 병원에 찾아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진료실에 들어가 내 상황을 다시 알리며 묵사발을 만들어 줘야 하나 싶지만 당장 그 병원이 들어설 건물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멈추는 것만 같다. 기분이 우울해진다. 결국 다치는 건 나다.



2019.10.31.목

마냥 달갑지만은 않은 10월의 마지막 날



2019.11.09.토

올해 유독 한 해의 끝이 빨리 오지 않기만을 그렇게나 바랐는데 역설적으로 차디찬 겨울바람에 나무가 앙상해질 때까지 떨군 그 수 많은 노오란 은행잎이 기분 좋게 한다.



2019.11.21.목

어느덧 코끝이 찡하도록 추운 겨울이 왔다. 날씨 탓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도 전구가 환하게 밝혀진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는 잠시  갈 길을 멈춘다. 그 사람들 사이에서 문득 ‘나는 어쩌면 내 자리를 비워주기 위해서나 회사로 돌아가겠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한두 시간만 앉아있어도 바로 통증이 오는 골반과 허리. 이 상태로는 복귀는 어림도 없는 일이겠지. 솔직히 나는 6개월이라는 짧고도 긴 시간이면 내가 이 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랬기에 회사를 내 의지로 떠나면 떠났지, 절대 포기하게 될 거라고는 그동안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얼마나 무지하고 오만한 태도였던가. 반성하는 마음으로 남은 올해를 보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일 년의 끝이 머지않은 오늘 하루 앞에서 다들 어떠신가. 나와는 또 다른 생각을 하고 계시는가? 보고 싶다. 침울한 내 의견이라도 올해가 다 가기 전에 얼굴 보며 얘기 나눌 수 있기를. - (낮에 보면 후회할지도 모르는) 새벽에 쓰는 일기 끝



2019.11.22.금

오늘 또 길 한복판에 홀로 서서 울었다. 한참을 넋을 놓고 정처 없이 헤매다 터덜터덜 집에 들어왔다. 온몸의 진이 다 빠진다. 말하기도 귀찮다. 인생이 참 허무하다.


2019.11.23.토

소확행1. 아무도 없는 옥상 정원에서 노래 듣기


※부록 [요양 기간 제일 많이 한 것] -PS. 언택트 시대에 해볼만한 것들

1. 넷플릭스

2. 인스타그램

3. 유튜브

4. (게임 앱) 츠키의 모험/ 밥 먹고 갈래요?

5. 독서


[나를 사로잡았던 문장.] Life isn't about waiting for the storm to pass.  It's about learning how to dance in the rain. 인생은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빗속에서 춤추는 법을 아는 것이다.


[독서리스트]  

강화길 외,<2020 제 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문학동네, 2020.

김신회,<아무튼 여름>,제철소,2020.

김예지,<저 청소일 하는데요?>,21세기북스,2019.

김지혜,<선량한 차별주의자>,창비2020.

박준,<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문학동네 2012.

미깡, <해장음식: 나라 잃은 백성처럼 마신 다음 날에는>,세미콜론,2020.

이금이,<알로하, 나의 엄마들>>,창비,2020.

이다울,<천장의 무늬>,웨일북,2020.

이슬아,<일간 이슬아 수필집>,헤엄출판사,2019.

이슬아,<부지런한 사랑>,문학동네,2020.

장희원 외,<소설보다 봄,여름 2019>,문지,2019.

헤르만 헤세,<초판본 데미안>,더스토리,2017.


-독립서적류-

김성라,<눈사람 귤사람>

김승연,<창덕이와 붕어빵>

김아영,<나와 승자>

섬,<산보>

최영분, 정다정,<베란다마중>

채은,<온실 속 헬륨가스>

ENGI,<지붕 위 삐롱커피>


[플레이 리스트]  

강아솔- 그대에게  

검정치마- Everything  

권진아- Lonely night  

김사월- 꿈꿀 수 있다면 어디라도, 수잔  

김사월,김해원- 허니 베이비  

김윤아- 야상곡 (미스터 선샤인 OST), 봄날은 간다,  

김필,김창완- 청춘 (응답하라 1988 OST)  

나얼- 귀로  

나의 아저씨 OST- 그사나이  

다영- 고래가 나를 삼켜버렸어  

릴러말즈_ Trip

마미손,둘째이모 김다비- 숟가락행진곡  

미스터 션샤인 OST- Greensleeves (Musicbox Ver.)  

박진영,선미- When we disco  

백현진- 학수고대했던 날  

산울림- 무지개  

생각의 여름- 대전, 골목바람  

서도- 야상곡  

슬기로운 의사생활- 밤이 깊었네  

신승은- 쇳덩이  

아이유- 비밀의 화원  

오프더메뉴- 정착  

위대한 쇼맨 OST- This is me  

유아- 숲의 아이  

이날치 밴드- 범 내려온다  

장기하와 얼굴들- 사람의 마음  

장범준- 사랑의 재개발  

커피소년- 행복의 주문  

헨리,수현- Nothin on you  

황소윤- Holiday  

Ava max- kings&Queens  

Chet baker- My Funny Valentine

Coldplay- Fix you  

Fleet foxes- White winter hymnal  

Lizzo- Truth hurts  

Maroon5_ Memories 83  

Pink sweat$- Honesty (cover by Vincent Blue)

Sasha sloan- Is it just me  

Sia- Snowman  

Tones and I- Dance monkey  

Vance joy, Kina grannis- Riptide

 

[넷플릭스]  8월의 크리스마스,  가구야 공주 이야기,  굿 플레이스 시즌 1,2,3,4,  귀를 기울이면,  나의 아저씨,  더 폴리티션 시즌 1,2,  동백꽃 필 무렵,  두 교황,  마녀 배달부 키키,  마루 밑 아리에티,  모노노케 히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베르사유 시즌 1,2,3,  보건교사 안은영,  붉은 돼지,  비포 미드나잇,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빨간 머리 앤 시즌 1,2,3,  사이코지만 괜찮아,  슬기로운 의사생활,  신은 나에게 직장을 주어야 했다.,  아이 엠 낫 오케이,  어둠 속으로,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 시즌 1,2,  이번 생은 처음이라,  이웃집 토토로,  이태원 클라스,  작은 아씨들,  종이의 집,  천공의 성 라퓨타,  추억의 마니,  트링킷 시즌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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