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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Oct 03. 2022

어쩌면 귀가

3. 병상일기 - 길고도 긴 여름(2)

2019.07.09. 화 

What makes you unique? 

몸의 회복도 문제지만 이젠 정신적인 트라우마도 걱정된다. 당장 어제부터 새벽 두 시만 되면 잠이 깨서 네시나 돼야 다시 잠을 청할 수 있다. 오후만  되면 몸이 너무 피곤하다. 내가 회복이 설령 될지언정 일상생활을 제대로  꾸려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매번 일보단 몸만 사리는 사람이 될 것만 같은  불안에 사로잡힌다. 모든 것이 내가 감당하기엔 한계치에 도달하고 있다. 몸이 나아질 때쯤이면 해탈을 했을는지 트라우마로 남아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평범하긴 그른 것 같다. 다만 이번 기회로  인생 공부를 제대로 하고 더 깊은 사람이 되어 남은 생을 멋지게 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아침에 부모님은 인천에 가시고 지난번처럼 또 감정이 대폭발 하고야  말았다. 그 순간만큼 멀쩡히 살고 싶다는 사실이 간절한 적이 없었다. 다들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네줘서 고맙고 또 고맙다. B 병원에서는 기존 판단  고수, 양쪽 말이 너무 판이한 관계로 급하게 이번 주 목요일 서울에 있는 C 대형병원 유명 척추신경외과 의사의 예약을 잡았다. B 병원 쪽 의사도 순순히 얘기를 들어보라고 의뢰서를 적어줬다고 한다. 이제 목요일 오후쯤이면  대강 앞으로 재활에 전념할지 재수술을 하게 될지 가늠이 잡힐 것 같다.  제발 A 병원 의사에게 쌍욕하고 이번 기회로 연을 끊을 수 있기를. 증상이  나타난 지 이 주나 넘고 난 이 시점에서야 내 대소변 마비 증상 회복의  갈피가 잡힌다는 게 어이가 없지만, 인생은 원래 그런 거겠지. 


부모님이 올라가시니까 내가 아무리 움직일 수 있다고 해도 동생의 도움 없이는 생활이 힘들다. 이 상황을 겪다 보면 무슨 소설 >의 현실판을 찍고 있는 느낌이다. 동생은 누나의 다리가 되어주고 누나는  동생의 눈이 되어 서로의 부족을 채워준다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교과서적 교훈. 진짜 웃프다. 


실천좀(무무언니, 몽지) 멤버들과 사심 채우는 정보회사를 차리고 싶다.  각자 성격과 취향 관심사에 대한 정보를 TMI처럼 메일로 전송해주는 회사  말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가고 싶은 뮤직 페스티벌에 우리가 좋아하는  가수가 오는 날을 알려준다던가 이런 것들, 한마디로 각자의 취향을 파는  거다. 벌써 홍보문구도 생각해 뒀다 모든 것이 이를 위한 빅픽쳐인 것처럼  와플 ppt에 다 있었다. 진짜 실천좀이 해낼 수 있는 아이템인 거 같다. 



2019.07.10. 수  

다른 병원에서 소견서 들고 가서 미뤄둔 실밥 제거: 3~4일 뒤면 가벼운  샤워가 가능하다니 그것만으로도 살 것 같음. 



2019.07.11. 목 

서울 C 대형병원 진료받으러 새벽 6시부터 사설 구급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가서 1시간 대기 끝에 5분 진료, 수술 잘 됐고 대소변 회복은 장담을 못 해 아예 안 돌아올 가능성도 있음, 재활의학과와 비뇨기과 예약 잡는 거로 하고 협진하는 거로. 하지만 통원치료로 그나마 제일 빨리 잡은 게 다음 주 금요일. 알고 보니 B 병원 의사랑 친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작은엄마가 급하게 다른 서울 D 대학병원에 힘들게 진료를 잡았으니 오라는 연락을 받아서 다시 또 다른 서울 D 대학병원 정형외과 진료를 받으러 갔다.  하루 종일 너무 무리한 탓인지 진료대기 막판에는 거의 쓰러질 뻔했다.  여기서도 수술은 잘 됐다는 견해, 하지만 주말에라도 수술받았으면 더  경과가 좋았을 거라는 입장. 아직 제대로 관리법이나 검사를 못 받은 거  같으니 아예 입원해서 재활의학과와 비뇨기과 협진을 통해 관련 검사를  받자고 해서 바로 입원하게 되었다. 살 것 같다. 저녁부터 검사에 들어감. X-ray, 피검사, 항문 반응 검사. 걷는 것 직접 확인  등등 자고 싶다.... 



2019.07.12. 금

화요일 이후 정신이 없어서 글 쓰는 걸 미뤘다. 10일 이후의 일을 지금에서야 적는다. 내가 있기엔 더없이 좋은 곳! (7층 창가 자리라 산동네 뷰가 아주  끝내준다. 창문도 열 수가 있어 덜 답답하다)  하지만 주위 숙소가 엄청 비싸고 여인숙 수준이라 가족들이 고생할  듯하다. 정형외과 회진 후 비뇨기과 외래와 재활의학과 방문 확인을 받았다.  주말이 껴서 다음 주 월요일부터 자가 도뇨 훈련 들어가고 스케줄 잡히는 대로 신경 근전도 검사받기로, 바늘로 찌르는 거라 좀 많이 아플 거라고는  하는데 제일 정확히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검사라고. 대변이 다시 또 안 나와서 변비약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2019.07.13. 토 

병원 창밖 한남동 풍경을 볼 때마다 익숙하다.  마치 이진리 카페 주변을 서성거리는 느낌. 

나는 왜 서울에서 강릉을 찾고 있을까. 


머리를 자름. 몽실언니인 줄. 병원에 방문 미용사가 와 있길래 기르기  편하게 일자로 최대한 짧게 머리숱 정리만 했다. 그리고 드디어 아픈 후  첫 샤워! 사실상 뜨거운 물 끼얹기인데 그래도 한결 시원, 근데 머리를 두  번이나 감았는데도 침대 등 온 사방이 털갈이하는 것처럼 머리카락 뿜뿜. 처음으로 다른 사람인 실천좀 친구들에게 글 쓰는 걸 알리고 같이  조인해서 세 명의 얘기를 익명으로 독립출판하는 게 어떻겠냐고 의사를  물었다. 모두 찬성! 나 혼자만의 얘기가 아닌 우리들의 얘기를 담을 수  있다는 사실에 시너지 효과가 기대된다고, 천천히 해보기로!

 


2019.07.14. 일 

앞으로 내가 회복된다고 해도 일반적인 조직 생활은 힘들다는 생각에  현상 유지라도 하면서 사회생활을 하는 공동 창업을 생각하게 된다. 실천좀  친구들 모여라! 강원창조혁신센터의 유휴공간 지원과 내 돈,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서 유니버셜 디자인 공간을 만들고 싶다. 그 공간에서 우리의 색을 담은  일들을 벌여나가는 거다!  

1. 1층과 턱이 없고, 가는 길이 되도록 평지일 것.  2. 지은 지 조금 오래된 가정집 같은 공간.  3. 주 4일제, 일주일에 한 번 재택근무, 1년에 한 달 여행 휴가. 일단 생각나는 건 여기까지 근데 당장 대변 어쩔....


따로 글 쓸 여유는 없으니 앞으로는 서울 D 대학병원 입원 이후 동안  주위에 보낸 카톡 내용, 통화 녹음 등을 나중에 정리해서 글 써보기로!  (주로 카톡 내용일 테니 나중에 잘 되면 카카오나 삼성, 아니면 시작은 메모였으니 네이버 입사....(?)는 내 건강상 무리고 이들을 상대하는 프리랜서가 되는 빅픽쳐를 꿈꿔본다. 아.... 이게 더 힘들려나?) 


얼마 전 내가 희망의 아이콘이 되리라는 오만을 반성하며.... 나는 몸만 큰  아기였다. 아이콘은 개뿔, ‘나 하나만 잘 건사하고 살자’로 모토 변경 



2019.07.27. 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재활치료사분은 치료 시간 내내 거의 토크 박스 기계 수준으로 항상 말을 거신다. 가끔 무리수를 던지시기는 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에게 저렇게나 말을 거는 걸 보면 대화법을 따로 전공 시간에 배우나 싶은  생각마저 든다. 내가 사회생활할 때도 유용할 것 같아서 어떻게 말을 거는지 배우고 싶을 정도이다. 내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재활치료사분은  주로 호구조사 대화법을 구사한다. 사는 지역, 직장인이면 직장, 학생이면 학과, 안 그래도 이번 상황을 책으로 쓰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이거 흔한  경험 아니라고 글 써보라고 얘기하셔서 뜨끔했다. 실습생들은 나와 비슷한 대화 구사력을 가진 듯하다. 보지 않아도  언제 어떤 말을 내게 걸어야 할지 동공 지진이 일어나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렇게 건 말들은 대부분 실패한다. 아무래도 재활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불안한 편이고 긴 재활 훈련 시간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보내기 위해서 먼저 말을 거는 것 같았고 나도 솔직히 그렇게 말을 걸어주는 것이 재미있고 좋았다. 재활치료 말고도 운동 치료도 따로 받는 중인데 운동치료사 분도 만만치 않게 재미있으시다. 이전부터 운동신경이 별로 안 좋은 편이었다고 하니까 운동법 못 따라 할 때마다 웃으시면서 예전부터 운동신경이 안 좋은 편이었다니까 이해해 주는 거라고 다시 알려주시고 그래도 못하면 진지하게 “이 동작 아프기 전에도 못 했을 거 같아요?” 물어보신다. 그런데  진짜 예전에 나라도 못 할법한 동작이어서 그렇다고 얘기했다가 서로  빵 터지고 그런 와중에 다른 치료사 실습생분들한테 내 전공이 뭐였을  거 같냐고 퀴즈 내셨는데 미술, 음악, 현대.... 무용....... 방금 전까지 저렇게 헤매고 있던 걸 같이 봤으면서 왜.... 민망함은 제 몫인 거죠? 아니면 정말  하이 개그였던 걸까. 운동 치료 중에는 공을 던져서 받는 훈련이 있는데 이 훈련을 할 때는  오히려 실습생분보다 내가 조금 실력이 나은 편이라 실습생분이 공을 잘  못 던지셨는데도 그걸 내가 받고 있으니까 치료사분이 또다시 진지하게  “팔로는 잘하는데 다리가 문제였구나?” 말씀하셨는데 반박할 수  없어서 서로 또 웃고 그래도 내가 공 받는 건 전부터 못 하진 않았다고  얘기하니까 그런 것 같다고 인정해 주시는 게 왠지 웃겼다. 대변 쪽에 마비가 와서 전혀 컨트롤이 안 되는 바람에 작업치료 중에 대변 실수한 적이 두어 번 있었다. 물론 기저귀를 차고 있어서 옷을 버리든가 하지는 않았지만 내 코에서도 이렇게 냄새가 나는데 치료사분들이 거기에 대해서는 모른 척해주고 오히려 정신없을 정도로 다른 말을 걸어줘서 참 고마웠다. 아, 작업치료사분이랑 운동치료사분이랑 서로 누가 더 시끄럽냐고  물어보실 때도 있는데 뭔가 두 분의 티키타카가 아주 잘 맞아서 곁에서 보는 나도 즐거운 적도 많다. 확실히 웃으니까 기분이 가라앉는 것도 좀 나아진 것 같다. 물론 모든 치료사가 존경스러웠던 건 아니었다. 아마 열 치료를 받고  있을 때였을 거다. 치료실 안이 조용해서 환자들이 다 듣고 있다는 걸.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데도 자기들끼리 차트를 보더니 “심리가 극도로  불안함이라고 적힌 환자들은 옆에서 조금만 건드려도 운다?”라며 서로 웃는데 어쩌면 환자의 민감한 정보를 그런 식으로 매도한다는 게 속이 상했다. 역시 모든 치료사가 좋은 사람일 수는 없겠지. 그래도 실습생부터  대부분의 치료사분이 자기 직업에 소명 의식을 가지고 일하시는 것 같아서  멋지다고 생각한다. 


입원하고 있다 보면 간간이 의사분들 가족이나 친인척분들이 입원했을  때도 있었는데 교수급 가족이면 그 사람이 7촌 당고모쯤 되는 먼  친척이어도 그 과 인턴들이 죄다 인사드리러 오고 다들 급 공손해지는 게 웃펐다. 나도 의사 한 명쯤은 알아둬야 했던 걸까. 집안에 의사와 검사 한 명쯤은 있어야 한다던 할머니의 말이 마냥 터무니없지는 않았다는 걸 새삼 느낀다. 


어제 코젤다크 주차판을 본 뒤로 시원한 맥주 한 병이 너무나도  간절하다. 인스타그램을 봐도 맥주만 눈에 띈다. 못 먹는 건 아니지만 입원  말고도 수술 염증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고 최소 3개월은 음주를 자제해야 한다고 했다. 시밤 


오늘 수술 뒤 처음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배불러서 반밖에 못  먹었지만 맛있었다. 다들 아이스크림을 아예 먹으면 안 된다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소화도 잘 안 됐고 입은 소태처럼 짜기만 한 데다 냄새에 극 민감하고 대변을 보는데 힘들까 싶은 강박에 먹는 것 자체를 꺼렸다. 내 생애 이렇게 음식을 거부하는 날이 또 있을까 싶다. 다른 이유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이런 영향 때문에 의사 선생님이 음식을 굳이 의식해서  안 먹을 필요는 없다고 충고를 해주셨다. 하지만 분명 충고를 들었음에도  안 먹어서 내가 봐도 신경이 많이 예민해졌다. 지금은 배부른데 배가 고프다. 좀 살만해졌나. 


내가 한창 신경이 예민해진 데는 갑자기 꼬리뼈에 전에 없던 이상 감각이  생겼기 때문이다. 꼬리뼈 끝에 무언가 꽉 뭉쳐서 안쪽으로 눌린 느낌이  갑자기 침대에서 일어난 뒤로 들었다. 이전에는 전혀 느끼지 못한 새로운  느낌이고 정자세로 누워있지 않는 이상 계속 강하게 느껴져서 신경이 곤두선다. 무엇보다 그곳은 내가 수술 전 가장 아팠던 부위이고 이로 인해  신경이 꽉 눌려서 마미증후군이 생겼기 때문에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가족들마저 초 예민해져서 의사 선생님이 신경통일지도 모르니 약 먹으며 2~3일 경과를 두고 지켜보자고 하셨지만, 증상이 나타난 그다음 날 바로 비급여로 70만 원짜리 MRI를 찍어 혹시나 신경이 더 눌렸는지를 확인해보았다. 다행히 수술 부위에 큰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신경통약을 먹음에도 증상은 나아지지 않는 중. 의사 선생님은 이것도 감각이 돌아오는 과정 중에  하나라고 본다며 정 불편하면 신경 주사를 맞아보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이렇게 얘기가 나오기까지 특히 MRI를 찍기 전날 저녁에는 진심 신경이 너무  곤두서서 컨디션이 급강하했다. 갑자기 온몸이 덥고 머리도 아프고 몸이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았다. 무엇보다 감정조절이 안 돼서 그냥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뇌를 거치지 않고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결국 의사 선생님이 회진 오셨는데도 울어서 진지하게 정 힘들면 정신과 약물치료도 괜찮다는 권유를 받았다. 다행히도 재활치료를 받고 낮잠을 좀  잤더니 어느 정도 컨디션이 회복된 듯하다. 


지금 입원한 병원에서 느낀 건 다들 환자 말을 들어주려는 태도가  보인다는 것, 다른 곳에선 시간 맞춰서 너는 떠들어라. 나는 내 말할  테니 식의 권위적인 태도가 컸다면 지금 이 병원은 말을 듣고 이에 관해 설명하거나 알려주려는 성향이 강한 것 같다. 특히 재활의학과에서는 마음  상태가 어떤지 꼭꼭 물어보시는데 그 점이 참 인상에 남았다. 간호사분들도 친절하셨는데 병원 크기보다 간호사 인력이 적어서 제때 일을 못 해결하는  일이 많았다. 계속 방광이 늘어나지 않도록 제시간에 소변을 빼 주어야 하지만 늘 바쁘시니까 안쓰러워서 나도 더는 재촉하지 못하는 빈도가  잦았다. 태움이라는 것도 아마 이런 환경 속에 처한 이들이 겪게 되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하루다. 


처음부터 이런 병원에 찾아와서 진료를 받았으면 이 상황까지는 안 오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이 남는다. 지방에 산다는 이유로, 주말이라는 이유로 그나마 위태위태하게 세워진 의료시스템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건 너무  억울한 일이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관심이  생겼다. 


유니버셜 디자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누구나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곳, 후에 기회가 된다면 와플이 만들 공간에서 이를 풀어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의 경우에만 봐도 평지로 오고 갈 수 있고 계단이 없는  1층, 내 키에 맞는 세면대가 있어야 원활한 생활이 앞으로 가능할 듯한데  SNS를 보다 보니 무장애 놀이터처럼 모든 아이가 장애 구분 없이 놀 수  있는 공간도 우리나라에 생겼다고 하니 마냥 먼 얘기 만도 아닐 것 같다.  아니면 아예 커스텀 디자인 쪽으로 실천좀 각 구성원에게 맞춰진 공간을 구성해 보는 것도 좋겠다 싶다. 요리를 좋아하는 무무언니에 맞춰 조리대  높이나 폭 등을 조절한다든지 각자 취향의 식탁과 컵, 식기, 음식을  큐레이팅 하여 ‘실천좀 H의 식탁’ 식으로 메뉴화해도 재미있을 것 같다. 나의 취향을 판다는 것, 얼마나 즐거운 일일까?


지금 내가 다시 공부해서 의사가 될 수 있을까. 다른 어른들 말대로  의사 남자 친구, 남편을 구하는 게 인생의 정답인 걸까. 내 편에서는 차라리  전자가 더 확률이 높을 것 같다. 아니면 돈을 아주 많이 벌어서 주치의를  고용하는 게 빠를지도. 


이 일기 혹은 메모에 제목을 붙인다면 어떤 게 좋을까.  ‘일상이 스쿼트야.’, ‘일상은 스쿼트’쯤이 괜찮지 않을까. 



2019.07.29. 월 

재활 훈련하러 갔던 첫날 병실로 돌아갈 때 재활치료사분이 실습생에게  내 에스코트를 부탁하며 했던 말이 아직도 선명하다.  

“이성적인 대화가 가능한 분이니 이성적으로 대해 주세요.” 

그땐 그 말의 의미를 이해 못 해서 웃어넘겼는데 이젠 알겠다. 나는 내 의지를 넘어선 감정의 물결을 만났고 쓸려 내려갔다. 치료에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할 집으로만 미친 듯이 가고 싶다는 생각에 말이 곤두서고 잠을  아무리 자도 피곤하기만 하고 모든 게 귀찮고 부질없으면서도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나고 그냥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바랬는데 퇴원을 결정하고 일단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순간 그런 마음이 온데간데없이 사그라들고  평온해졌다. 나는 집에 가고 싶었구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들은 또 얼마나 병원에서 이성적인 대화를 하지 못하고 휩쓸리고 있을까. 


재활치료를 받으러 갈 때 휠체어 이송을 해주시는 게 부담스러워서 거부했는데도 기어코 태워 가셨다. 앉아있으면 허벅지 뒤쪽이 당겨서 더  불편한데도 재활치료실에 걸어서 들어오는 환자가 드물어서 치료사분들이 걸어서 들어오는 환자만 봐도 혹시 다칠까 봐 불안해하신다고 했다. 그동안 내 발가락은 힘이 현저히 빠져 있었다. 그래서 그동안의 걸음걸이도 이상했던 거라고 재활치료사분께서 설명해 주셨다. 왜 A 병원에서는 담당의에게 같은 증상을 호소했어도 괜찮다고만 했을까.  예전부터 증상이 있던 왼쪽 발가락이 현저히 힘이 떨어져서 스트레칭을 꾸준히 해줘야 한다고 한다. 



2019.08.01. 목 

내가 그렇게 집에 가고 싶었던 건 강릉 자체가 아니라 자유롭게 꿈을  꾼다며 멋모르고 설쳐대던 내가 그리워서였다는 걸 깨달았다. 집에 온 지 3일 만에 다시 감정이 휘몰아친다. 단순히 장소의 문제가 아니었다. 집에 가고 싶다고 느꼈던 그날도 그랬다. 인스타그램에서 위크엔더스에 간 와플 친구들이 웃고 있는 사진을 보았다. 나도 불과 한 달 전 저 일원이었는데. 위크엔더스도, 생각의 여름 콘서트도 나도 함께 공유하던 거였다. 내가 저 안에 들어가 있지 못하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집에만 가면 여느 때처럼 모든 게 다시 돌아갈 거라고 바보처럼 믿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란 걸 또 바보같이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혼자서 밖에 나가는 것도 아니 문 하나 여는 것조차 주저하는 내 모습이 짜증 난다. 



2019.08.02. 금 책 제목 후보 2: ‘내 신경 건들지 마!’



2019.08.03. 토 

꿈을 꿨다. 팀장님과 몽지랑 야외수업 인솔 진행이 꼬여서 한참을 걷고  창고를 뒤진 뒤에 물건까지 한참 빼고 나서야 해결되었고 그러자마자 잠에서 깼다. 새벽 다섯 시였다. 하다못해 나는 왜 꿈에서까지 이러고 있을까. 잠을 잔 것 같지가 않다. 피곤하다. 사람들은 병가를 낸 환자는 침대에만 누워있어야 한다고만 생각하는 듯하다. 물론 푹 쉬어야 하는 시기도 분명 필요하지만, 장기 병가를 냈을  때는 오히려 재활 차원에서 밖에 나와 가벼운 활동이 필요하다. 이러한 사실은 의사들도 권장하는 바이다. 평생 누워서 살 사람이 아니라면! 누군가 병가를 냈는데 밖에서 우연히 그를 마주치게 되었다면 의심의 눈초리로 뒷말을 남기기보단 사회로 한 걸음 더 밖에 나온 사실을 축하해줘야 한다. 의심의 시선으로 보기엔 우리나라의 의료체계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병가를 낼 정도로 진단서가 그렇게 쉽게 나오지 않는다. 본인이 정·재계 인사가 아니라면 더더욱. 



2019.08.13. 화 

잠이 벌써 깨버렸다. 밤새 악몽에 시달렸는데도 눈은 말똥말똥하고  놀라울 정도로 개운해서 놀랍긴 한데 기분은 개떡 같다. 나도 내가 무슨  마음인지 모르겠다. 요 며칠 계속 다음 주 병가가 끝나는 것 때문에 기분 더러운 꿈에  시달린다. 꿈에 팀장님을 비롯한 회사 사람들이 나와서 내 최대 약점인 몸을 움직이는 일로 직살나게 고생하는 꿈을 시작으로 대리님이 꿈에 나타나서 내가 회사에서 잘못한 일들에 대해 직설적으로 혼내는 꿈을  꾸더니 이젠 이 모든 게 다 짬뽕으로 섞인 꿈에 시달린다. 나는 회사에 별다른 미련이 없다. 내가 소속되었던 팀도 같이 일한 인턴  동료들이 좋은 사람들이라 즐거웠던 거지 아이들을 상대하는 걸 겁냈던 내가 주로 아이들을 다루는 프로그램을 맡게 되면서 적성에 맞는 일을 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굳이 미련이 남았다면 그나마 흥미가 있었던 도록을 못 만들고 나온 게 조금 아쉬웠달까. (하지만 설령 도록을 만들었다 해도 팀장님  의견대로 세세한 것까지 맞추다가 스트레스받았으리라.)  병가 전까지 분명 강릉에서 내가 즐거워할 만한 일과 제일 근접한 일을  찾았다 해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괴리감과 팀장 밑으로 인턴들을 바라보는 게 곱지 않은 일부 직원들의 시선 때문에 상처받은 것들이 있어서 차라리 홀가분하기도 했다. 내가 다만 두려운 것은 당장 나를 지탱해주던 최소한의 월급과 인턴이지만 하고 싶은 분야의 일을 향해 밀고 나간다고 애쓰는 최소한의 사회적 지위, 강릉에서는 이 회사 말고는 더는 비슷한 분야의 일을 배우기 힘들 것이라는 사실이다. 남은 카드는 내가 직접 일에 뛰어드는 건데 전만큼  막막한 건 아니지만 아직은 더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회사는 그나마 이 지역에서 동냥으로 관련 소식을 듣기에 적합한 곳이었고 나는 이 강릉이 맘에 들며 현실적으로 타지에서 계속 사는 건 무리이니 '이곳에서 버텨야만 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회사를 떠나는 게 두려워진 것이다. 엄밀히 이 회사 자체가 아닌 이 ‘일’을 그만두기엔 내가 미련이 너무 많았다. 회사에서의 권고사직이 이 바닥에서의 마지막일까 본능적으로 두렵다. 회사의 인턴이라는 심리적 도피처가, 돈줄이 사라지는 것이 당장은 아쉽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나는 지역 문화 기획 일이 좋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이곳에서 비롯된 모든 일이 지역 문화기획에 스며드는 순간이 너무나도 짜릿하다. 내가 잘 호흡할 수 있는 바운더리를 낀 이곳 강릉의 문화를 기획하는 것이 부딪힐수록 즐겁고 뿌듯하다. 내 모든 걸  담고 싶어 진다. 나는 정말, 이 ‘일’을 그만두고 싶지 않다. 확신할 수 있는 내 꿈을 드디어 찾게 되었는데 혹여 나의 사직이 이 꿈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밤새 악몽에 시달리다 새벽 일찍 깨서 아빠가 내 맘에 들지 않게 대충 잘라놓은 엄지발톱 때문에 계속 이불에 발톱이 걸리자 형용할 수 없이  엄청난 짜증이 치밀었다. 발톱 하나 제대로 못 깎는 내 한심한 몸 상태와 변함없는 마비 증상, 이로 인해 그만둬야 할, 잘릴지도 모르는 직장, 직장을 나오기까지 겪어야 할 불편한 순간들, 사람들의 소문, 이런데도 나을 기약 없이 희망만 조금 던져주고 매일매일 그 크기와 범위가 달라지는 신경통,  예민하고 우울해져 피폐해져 버린 내 정신세계,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까지 잘못 깎은 발톱 하나가 애써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들을 꼬리 물고 늘어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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