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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Sep 30. 2022

어쩌면 귀가

3. 병상일기 -늦봄

2019.06.22.토 

첫 날 무슨 정신에 이걸  찍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병원  입원하니까 그냥 한 번쯤은 아픈  티를 좀 내고 싶었다. SNS 입원  샷의 정석이랄까? 엄마가 아픈 건 원래 널리 널리 알리는 거라 그랬어!! (사실 나중에 아무도 안  믿을까 봐 라고는 굳이 말 안 할래) 



2019.06.23.일

그 와중에 엄마가 편의점에서 급하게 사 온 종이컵 뒤태가 너무  빵실해서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이스 베어!)

나의 애마. 내 키에 맞춰서 높이 올리느라  다들 낑낑 보조기와 환상 콤보!  이걸 몰고 잠시 1층에 내려가기라도  하면 주위 사람들의  "젊은 사람이 쯧쯧..." 안쓰러운 시선을 한눈에 받을 수  있다.  


병원 와이파이에도 다 비밀번호가 걸려있었다. 세상엔 역시 공짜는 없어.  


서울국제도서전 왜 사전등록해놓고도 가지를 못 하니!! 내년엔 기필코 멀쩡해져서 꼭 갈 거다. 



2019.06.24.월 

검사 결과는 더 볼 것도 없었다. 잘 모르는 내가 MRI를 얼핏 봐도 터진 디스크에 신경이 완벽하게 눌려있었으니까. 그동안 ‘그래. 결국 언젠가 수술하는 날이 오겠지’ 항상 마음 한구석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차라리 더는 조마조마하게 버티지 않아도 되어서 약간은 후련하다. 대소변 문제가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는 게 조금 맘에 걸리지만, 아직 내가 젊은 편이라 좋은 결과가 기대된다고 하셨으니까...기대를 품어본다. 전신마취라.... 



2019.06.25.화 

토요일 새벽 통증에 비함 수술 통증은 껌이었다. 갑자기 수술 뒤에 이전까지는 전혀 없던 오른쪽 뒤꿈치와 발 날이  먹먹해진 증상이 맘에 걸리지만 (발은 말초신경이라 조금 더 기다려봐야  한다 했다) 진통제를 계속 맞아서인지 무통 주사를 안 맞아도 통증은 괜찮았다. 다만 밤새 정자세로 절대 안정 취하는 게 좀이 쑤셨다. 



2019.06.26.수

더덕더덕,  여기...테이프 맛집인가요...? 내 팔 왜 이래...? 채혈 검사에 핏줄까지 잘 안 보여서 하루 종일 주삿바늘만 세 번 갈았다.  손이 너덜너덜 누더기가 된 것 같다. 

 


2019.06.27.목  

(새벽 세 시 반 감성=분노?)  내가 이러고도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더는 사람이 아니다.  여기도 나쁘진 않지만  갈 길이 까마득하게 멀지만, 집에 가고 싶다.

  

백수 때는 나는 스스로가 밥만 축내고 오줌하고 똥만 만드는 기계인 것  같은 게 불만이었는데 그것도 그나마 건강하니까 부릴 수 있던 호기였구나!  새삼 느낀다. (그래 그땐 이럴 줄 몰랐지) 이젠 중심 잡기! 머리는 대체 언제 감을 수 있을까... 


침대는 소름 끼칠 정도로 누운 키에 딱 맞다. 누가 나 자는 사이에 내 누운 길이 재어간 건가 싶을 정도로. 병실은 공간도 넓은 편이고 병간호통합서비스? 라는 게 있어서 간단한 건  침대 위 벨만 한번 누르면 엄마의 노고를 줄일 수 있다는 게 마음을 한결  편하게 한다. 그렇다고 엄마의 간호가 전혀 필요 없는 건 아니지만... (돈은  좀 더 들겠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듯, 역시 의료계도 자본주의 만세인  건가?!) 


회사 제출용 진단서에 대소변장애 때문에 의사 선생님이 먼저 석 달 끊어주신다 했는데 그나마 팀장님의 멘탈을 위해 두 달로 합의 봤다. 아빠도 회사에서 전화로 얘기 건너 들은 뒤로 나한테 차마 화는 못 내고 다른 사람들에게 화 뿜뿜 이제 슬슬 산재 얘기도 나오고 현실 얘기 나오니까 2월에 아빠가 재계약 뜯어말리면서 수술하자 할 때 내 편 들어주다 사이에 낀 엄마도 힘들어 보이고 멘탈 또 탈탈 털리다 겨우 회복.... 


텅장팸들한테 평생 보은하고 살아야지 어쨌든 마음 비우고, 편안하게! 일단 퇴원하게 되는 날만 생각해야지. 


혹시나 했는데 결국 오늘도 볼일을 못 보는 바람에 소변이 차 있는 것만 소변줄로 빼냈다. 물도 엄청나게 마시고 약도 다 챙겨 먹었으나 마려운  느낌만 나지 정작 나오질 않는걸, 아래쪽 감각이 꼭 부은 것처럼 빵빵하고  둔해서 소독약이 차갑다는데 한참 있어야 시원한 감이 조금 들다 만다.  오줌이라도 시원하게 눠 봤으면 좋겠다. 



2019.06.28.금 

'놀람-부정-체념-달관'이었던가? 사람이 충격받으면 겪는다는 감정 기복을 요 며칠 새 매일 반복하고 있는 것만 같다. 난생처음 관장 최악(체력소모 갑) 일이던 뭐건 중요한 건 내가 사는 거니까 이제 길게 보고 템포 조절해야지. (인생은 롱 런!) 열일해라 신경들아!!! 똥오줌 시원하게 누는 게 목표입니다! 



2019.06.29.토 

 

B 병원에 실려 온 지 일주일째, 수술 코드에서 다른 코드로 다시 손목 팔찌랑 이름표가 바뀌었다. 소변줄 뺐다가 다시 끼고 어제 관장해서  대변도 한숨 놓은 상태, 가족들도 의사 선생님도 신경 손상이 커서 다들 맘 편하게 먹고 약 먹으며 천천히 경과를 기다려보자고 하는데 오히려 그 말을  너무 자주 들어서 안심되면서도 혹시 끝내 회복되지 못하면 어쩌지 살짝  불안해진다. 그래도 어제까지 감정 곡선 타는 건 나아진 것 같다. 오늘도  잡생각 말고 멘탈 단련에 집중!



2019.06.30.일 

밥 먹고 혼자 1층 산책. 머리 비우고 있으니까 나른하다. 우울한 건 많이  사라졌는데 대화 통하는 사람들이 없으니까 말이 없어진다. 감정이 갑자기 메마르고 무료하다. 영화도 재미없고 함묵증이 생길 것 같다. (이게 우울한  건가?) 답답한 마음에 밥 먹고 틈틈이 걷는 시간을 좀 늘렸더니 몸이 금세  축 늘어지는 게 저녁이 힘들었다. 나 혼자 생각할 땐 금방 이러다가  멀쩡해지겠다 싶은데 주위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나 말들을 들으면  평생 이렇게 살아야만 되는 환자가 된 것 같아 싫다. 그냥 도움 되지도 않을  말이나 시답잖은 수다나 떨 거면 다들 그냥 입이나 쳐 닫아버렸으면 좋겠다. 조용히 나 피곤할 때 혼자 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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