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할머니의 방

by 에밀리

내게는 정갈하고 어둑한 할머니의 방이 자리하고 있다. 크지 않은 방에는 오래된 장롱이 있고 창문 아래 교자상 위로 성경책이랑 돋보기안경이 보인다. 문 옆에는 콩나물국 양념 냄새가 밴 수건이 지팡이와 나란히 걸려있다. 할머니는 세상에 하나뿐인 나의 그리운 큰 엄마, 이름만 불러도 눈물이 맺힌다.


엄마보다 더 오랫동안 불안하고 모자란 내 삶을 위해 기도하고 살피셨던 나의 할머니. 지금도 어둑한 방에 은비녀 쪽 진 머리, 야위고 작은 체형의 꼬부랑 등이 굽은 할머니가 내 안에 느껴진다.


환하게 웃으며 "우리 정이 왔네" 하고 환대해 줄 것만 같다. 할머니는 교통사고로 엄마를 여의고, 정처 없이 방황하는 나의 청춘을 묵묵히 지켜주었고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 되었다.


"할머니 내 곁에 오래오래 계셔야 해요! 나는 할머니랑 살 테야" 굽은 등을 세워 따순 밥을 차리는 야윈 할머니를 꼭 끌어안았다. "나는 살 만큼 살았어. 우리 정이가 시집가는 것을 보고서야 내가 눈을 감지" 할머니는 오 남매 중에 넷째인 내가 동생보다도 늦어져 혼기를 놓칠세라, 엄마의 빈자리를 살피고픈 마음이 더욱 간절하였으리라.


나는 걱정하는 할머니에게 남자친구를 데려갔다. 무슨 일을 하는지, 부모님이 계시는지도 묻지 않고, 늦은 낮이건 한밤중에도 밥을 차렸다. 화려할 것 없으나 유귀례 여사님만의 별미, 시원한 콩나물 국, 시래기 된장국, 고들빼기, 동치미, 그리고 김치류 두세 가지, 생선구이, 갓 지은 솥밥을 담아 정성스럽게 내주던 할머니. 우리는 고봉밥을 맛나게 들었고 그 모습을 무척이나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다섯 살 무렵에, 할머니 초가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고 아이들은 작은 방에 모여서 맛난 기름진 음식과 놀이로 축제의 시간을 보냈다. 더 자라서야 알고 보니 그날은 할아버지 장례식 날이었다. 평소에 할아버지는 꽃문양의 동그란 과자를 주고, 막걸리를 마시며 호방하게 웃는 분으로 기억한다. 앨범에 있는 흑백사진을 보면서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를 내가 본 것인 양 추억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할머니는 성경책을 즐겨 읽었고 담배를 태우던 모습이 떠오른다. 나와 스무 살가량 차이 지는 오빠들이 속을 썩일 때에도 평소와는 다르게 단호하고 매섭게 야단쳤다.


"내 딸에게 함부로 하는 자식은 내 손자도 아니다!" 내가 고등학생 시절, 사업 지원금 요청하며 엄마를 압박하는 오빠에게 할머니의 말씀은 아직도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지천명이 지난 엄마도 할머니에게는 여전히 여린 딸이었다! 엄마와 아내 역할로만 엄마를 생각했었다. 희생만 하는 엄마로서 처음부터 태어난 줄 당연히 여겼다. 가족을 위해 몸이 닳을 때까지 헌신하는 삶, 엄마도 딸이고 여자였다는 것을 나는 왜 생각을 못 했을까. 한편으로는 오십 후반까지 한평생 친정엄마가 옆에서 존재했던 엄마가 부럽다.


어린 시절에 할머니는 우리 옆집에 살았다. 그리고 이십여 년을 전주에서 막내 이모네 자녀들이 학업을 마칠 때까지 뒷바라지하고, 양옥으로 개조한 옛 집터에서 단출하게 여생을 보냈다. 나는 엄마가 그리운 날, 한겨울 빙판길 밤티재를 넘어 택시로 달려가기도 했다.


언제라도 묻지 않고 밥상을 차리고 품어주던 할머니가 그곳에 계셨다. 지금은 수 없지만, 할머니의 그릇은 아직도 나를 위로한다. 신접살림 혼수로 언니가 사준 그릇과 냄비 세트. 오래 전부터 죽음을 준비하며 언니에게 목돈을 맡겨 놓았다는 것을 알고 가슴을 적셨다.


엄마와 사별하고 매일을 탄식과 통곡 속에 보내다가 재혼한 아버지가 낯설어서 나는 할머니 집에 종종 찾아갔다. 이부자리에 나란히 누워서 조곤조곤 전래동화와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고 하면서도 흔쾌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할머니의 인생역정에 맞장구치며 공감하고 둘이 한참을 소리 내어 웃기도 하고 나지막한 음성을 듣다가 잠들기도 했다. 어떤 대목은 눈물을 흘리면서, 어떤 대목은 감정이입 되어 내가 이야기 속 인물들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덤덤하게 들려주는 할머니의 눈물을 닦아드리던 동지섣달, 그 시절 아랫묵이 그립다.


격동의 세월을 온몸으로 겪으며 극심한 남존여비 시대에 딸만 내리 셋을 낳은 할머니. 할아버지 떠나시고 이모부 급사하고, 큰 이모가 청상이 되자 눈이 한 달간 안 보였다고 한다. 또 둘째 딸, 59세의 내 엄마가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였을 때는 고통을 어찌 이겨내셨을까. 한 여인의 처절한 삶이 애처롭다.


95세, 뼈만 남아 가녀린 할머니는 굴하지 않고 집안의 어른으로서 남은 손자녀를 품어주며 생의 마지막까지 몫을 다 하셨다. 세 따님과 그 자손들이 살아오는 서사에 간절한 염원으로 함께한 할머니. 대하소설 열댓 권 줄줄이, 95년 일생이 배어있는 이야기를 세세히 기억하지 못하여 너무나 아깝고 송구스럽다.


할머니를 보내고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무조건적으로 믿고 품어주던 할머니방은 아직도 가슴에 자리하고 있다. 고단하고 지칠 때, 언제든 찾아가 쉴 수 있는 쉼터요, 내 글쓰기의 발원지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