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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

by 에밀리

나는 1970년대 초반에 2남 3녀의 넷째로 태어나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지런한 엄마와 자애로운 아버지, 그리고 두 살 터울의 동생과 네 살 차이 지는 조카가 있었고 오빠들과 언니는 대처에서 살고 있었다.


내 고향은 전주에서 소양 화심을 지나, 밤티재를 넘어 굽이굽이 들어가는 산촌 마을이다. 나의 할아버지들과 아버지 그리고 나의 형제들이 나고 자란, 전북 완주군 동상면이다. 심산계곡이라, 만경강 발원지인 밤샘이 흐른다. 12년을 살았을 뿐인 그곳, 나의 살던 고향은 오늘도 꽃이 피고 지고 있으리라.


푸릇푸릇 새싹이 돋고 만물이 깨어나는 봄이 오면, 쑥, 냉이 씀바귀, 달맞이풀을 캐러 바구니 들고 친구들이랑 "봄처녀 제 오시네" 부르면서 까르르 웃다가도 호흡을 가다듬고 박자를 세며 다시 또 부르던 노래가 먼저 떠오른다. 한가로운 겨울을 지나서 다시 시작하는 봄은 바빠져 일손이 부족한 때라 외지에서 찾아든 일꾼 아저씨들이 비어있던 아랫채에 숙식을 하며 농번기 한 철을 보냈다. 우리집은 표고재배를 크게 하고 있어서 많은 놉(일꾼)이 필요했다.


여름이면 농활에 참여하는 대학생들이 북적이는 마을은 더욱 생기가 돌았다. 세련된 대학생들이 일손도 돕고 어린이 프로그램으로 미술활동이나 연극, 풍금에 맞춰 노래 부르는 수업은 풋풋한 기억으로 남았다. 산간벽지의 국민학교에는 중장년의 남선생님들 뿐이라, 학생선생님들이 풋풋하고 매력적으로 보였다.


하얀 얼굴의 대학생들이 가져온 코팅지와 사인펜 스탬프 등 새로운 문물이 신세계처럼 다가와 공장제 냄새가 고급스럽게 느껴졌다. 시골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맵씨까지 시선을 끌었고 사투리 섞이지 않은 서울 말씨가 어찌나 멋지게 들리던지 강렬하게 그들을 동경했다.


지금 생각하면 전주에서도 한참 들어와야 하는 산촌마을을 찾아준 학생들에게 고마운 마음 샘솟는다. 이제 이순을 넘어 고희 언저리에 있을 그들은 그 시절을 어떻게 기억할지 궁금하다. 사십 년 전을 거슬러 봉사로 함께 해준 그 학생선생님들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봉사의 첫 씨앗을 뿌려준 선생님들 몇 분의 얼굴이 아직도 생각난다.


가을은 풍성한 수확으로 보기만 해도 배부른 계절, 무르익어 고개 숙인 벼처럼 겸손해지고 추수한 곡식으로 잔칫상을 차렸다. 마을회관에는 막걸리 한 사발에 민요가 어우러져 흥겨웠다. 집집마다 감턱에는 고종시(고종황제에게 진상하여 고종시, 씨가 없고 달고 맛있는 감품종) 껍질을 돌려 깎아 줄줄이 엮어서 매달아 곶감이 익어가는 마을풍경이 정겹다.


겨울은 날이 짧아져 다섯 시도 안되어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졌다. 조용한 마을에는 아침저녁으로 버스가 두 번 반가운 친지와 이웃을 실어 날랐다. 논농사와 밭농사를 짓고 겨울에 눈이 내리면 산세 험해서 버스가 못 들어오는 작은 산촌 마을이었다.


마법에 걸린 듯 눈 내리는 풍경을 보면 절로 탄성이 나왔다. 눈 덮인 장독대와 화단의 나무, 그리고 지붕 위에 수북이 앉은 눈덩어리, 마을을 에워싼 하얀 세상을 보며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고드름을 따서 '아이스께끼' 라며 핥아먹기도 했다. 비닐포대로 언덕길에 눈썰매를 타며 환호하던 반짝이는 어린 날들이 그곳에 있다.


삽살개가 뛰어노는 동네 어귀와 마을 골목골목으로 밥 짓는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어둑해지는 고샅에서 놀던 아이들은 따끈한 아랫묵을 찾아 집으로 들어섰다. 김이 펄펄 나는 여물을 외양간에 갖다 주면 누렁이가 커다란 눈을 끔벅이며 반겼다.


마을 가운데 자리한 우리집은 동네에 1호 '테레비'가 있었고, 용모단(용소龍瀟 지나 소재한 다섯 마을)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전화취급소였다. 십 리 이십 리 삼십 리 길을 걸어 전화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드나들던 시절이었다. 텔레비전을 시청하려고 저녁식사를 마치고 모여드는 이웃들로 기분 좋은 축제였다.


매일이 잔칫날인 듯 북적였고 나와 동생은 널찍한 마루를 걸레질하였다. 이웃들은 옥수수, 감자며 부침개 등을 가져오고, 나누어 먹으며 '테레비'를 보았다. 웃으면 복이 와요, 수사반장, 달동네, 암행어사 드라마를 보면서 울고 웃던 달님이 밤마실을 밝혀 주었다.



우리는 검정 고무신을 신고, 책보를 등허리에 사선으로 메고서 십리 길을 걸어 소풍처럼 학교에 다녔다. 몽당연필을 볼펜 깍지에 끼워서 쓰기도 하고 다 쓴 공책을 지우개로 지우고는 재활용하기도 했다.


장난스럽게 검정고무신을 멀리멀리 힘껏 차고는 키득거리며 놀았고, 월드컵 프로스펙스 운동화는 한참 지나서야 알았다. 물자가 부족하여 귀하고 소중하게 끝까지 아껴 쓰던 시절이었지만 시골 인심은 넘치게 후했다.


학교 오가는 길에 다람쥐를 흔하게 보았다. 오디를 따먹고 입 주변이 까맣게 물들기도 했고 벤토(도시락통)에 담아 오기도 했다. 누구도 아이들이 따먹는 오디서리에 대해 나무라지 않았다.


학교와 집사이에 '솔쟁이(솔징이)'라 불리는 아름드리 커다란 멋진 소나무 쉼터가 있었다. 우리 증조할아버지께서 심은 나무라고 기분 좋은 생색을 내며 그늘 아래에 도란도란 쉬었고 개울가에 물놀이를 하다가 집에 돌아갔다. 강산이 몇 번이나 바뀌어 도로확장으로 옛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는 새록새록 떠오르는 정경이 되어 가슴속에 고향길을 돌아본다.


그렇게 사십 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는 대도시 고층 빌딩숲에 살고 있다. 사방에 전철역, 대학병원, 고속터미널, 백화점, 상가, 온갖 의원이 즐비하고 지천에 필요한 것들이 널려있다. 어린 '나때[라떼]' 와는 다르게 문명의 이기와 풍요를 누리고 있다.


어디서든 흔하고 쉽게 구할 수 있어서 귀한 줄 모르고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멀쩡한 가구와 생활용품이 분리수거장으로 나온다.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넘치게 누리는데도, 만족하지 못하고 피로한 일상으로 허덕인다. 갈수록 경쟁은 치열해지고 모두가 같은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 타오르는 갈증은 해갈이 안되고 정처 없는 마음은 갈피를 못 잡는다.


일상은 나날이 더 바빠져 얼굴을 마주하고 나눌 수 있는 여유 없이 하루를 보낸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각자의 네모난 세계에 갇혀버렸다. 70~80년대의 고향의 낭만과 여유와 인심은 메마르고 앞만 바라보며 달리고 있다.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바빠! 바빠!' 외치며 허덕이고 피로감으로 절인 하루가 게으르게 저물고 위로받을 곳 없는 영혼은 위태롭게 비틀거린다.


우리는 무엇을 갈망하는가? 나에게 무엇이 중(重)한가! 어린 시절의 소박하고 천진했던 그 추억처럼 아이들을 편안하게 바라보고 싶다. 2남 2녀의 아이들 엄마로, 입시를 내리 치르면서 나의 말투와 눈빛은 속박이 되고 감시자가 되어있는 현실이 아프고 고통스럽다. 한 번만이라도 조바심 없이 느리게 먹고 느리게 걸었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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