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제시어는

나를 소개해 볼까 해요

by Agnes

한 학기가 시작하는 첫날. 첫날은 매우 중요하다.

첫날의 교실 공기를 위해, 첫날의 기선제압을 위해, 나는 나만의 제시어를 준비해 간다. 그리고 3개월에 한 번씩, 나는 내 제시어 리스트를 업데이트한다.




한 학기의 첫날은 1급부터 6급까지 모든 반이 자기소개를 하는 날이다. 한글도 안 배운 반 조차도 첫날은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를 하루 종일 반복하며 친구들의 얼굴과 목소리와 한국어를 익힌다. 그럴 때 아마 복도에서 귀 기울여 들여보면 장관일 거 같다. 여기저기 어눌한 한국말부터 유창한 고급 한국어까지, 왁자지껄 자기소개를 하고 있을 테니.


학생들은 앞에 있는 (제법 나이가 있어 뵈는) 교사의 신상이 궁금하지 않을 수 있지만 나는 일방적으로 내 자기소개를 열심히 한다. 내가 소개하는 방식으로 학생들도 소개하라고, 사례가 되어 주기 위해서다. TMI가 될 법한 정보도 한 두 개 덧붙여 주는 건 필수.


첫날은 나의 제시어를 넘겨 가며, 지난 학기에 배운 문법으로 문장을 만들어 보게 시킨다. 적당히 코믹스러운 상황도 일부러 연출하며 내 제시어를 휙휙 넘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스트레스, 쇼핑, 구두, 영수증


이 4개의 단어만으로 학생들은 무궁무진한 문장을 만들어 낸다.

한국어를 조금 배운 학생들은 '선생님은 스트레스가 있으면 쇼핑해요' 정도를 완성해 내고

한국어를 조금 더 배운 학생들은 '선생님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 쇼핑을 하는데, 구두를 사는 걸 좋아해요'

이 과정에서 나는 학생들의 현재 한국어 실력을 확인하고 앞으로 내 수업의 텐션을 결정짓는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내가 완성한다. 이런 식으로.


선생님은 스트레스받을 때 쇼핑을 해요.
구두를 사는 걸 진짜 좋아하는데 쇼핑 후에 영수증을 보면 다시 스트레스를 받아요.
그래서 다시 또 쇼핑을....


그럼 대부분 격하게 공감하며 자기도 그런 아이템이 하나쯤은 있다며, 자연스럽게 자기 쇼핑담을 서로서로 말한다. 그리고 학생들이 잘 알아들으면, 이렇게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선생님 아이는 선생님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요.
"엄마는 개미도 아닌데, 신발이 왜 이렇게 많지요? 엄마 발은 2개뿐인데 신발은 20개가....."


웃자고 하는 얘기다.




해마다 내 제시어를 업데이트한다. 팬데믹 동안 내 제시어에 오랫동안 <넷플릭스>와 <ZOOM>이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필라테스 요가나 실내 자전거 같은 실내 활동과 관련된 단어들. 팬데믹 동안 내 제시어는 자꾸 안으로 안으로 정적으로 정적으로 변화했다. 그런데 이 겨울 문득, 내 제시어들이 구닥다리가 된 것을 느꼈다. 세상은 빨리 회복했는데, 내가 못 돌아오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해외여행을 가고, 연말이니까 송년회도 하고, 결혼식도 하고 장례식도 한다. 어떤 게 일상이었는지 모르고 혼란스러워하는 건 나뿐이었다.


2023년에 다시 힘내서 수업을 하려면, 일단 내 제시어부터 따끈따끈하게 업데이트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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