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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nes Jan 17. 2023

우리의 엔딩은

어머니와 나

안다. 우리의 엔딩은 이별이다.


감사할 일은 어머니가 91세가 되심에도 아직 이별하지 않은 것이고, 슬픈 일은 아마도 곧 그날이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와중에 억울한 것은, 우리는 언젠가 모두 이별을 한다는 생의 공평함이다.


92세 어머니를 모시는 60세 시누이가 말한다. 이제 요양병원에 모셔야겠다고. 우선 삼시세끼 밥 챙겨 드리는 게 너무 힘에 부치고, 본인을 힘들게 하는 90 노인의 (점점 까탈스러워지는) 성정에 대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고상하게 말할 수 없는 실제적인 문제들(이를테면 대소변 문제)에 부딪치고 있다고. 제발 본인을 요양병원에는 보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시지만, 정말이지 이제 너무 힘이 든다고.


96세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60대 외삼촌 부부는 말한다. 1년 전 코로나 와중에 각종 질병과 치매를 감당할 수 없어 아버지를 잠깐 요양병원에 모셨는데, 두어 달 만에 집으로 모셔 올 수밖에 없었다고. 아버지를 더 이상 거기에 두면, 곧 돌아가실 것 같았다고. 그리고 다시 집으로 오신 지금, 몰라보게 건강해지셨다고. 요양병원에 두지 않길 정말 잘했다고.


91세 어머니께서는 나와 단둘이 되면 꼭 이야기하신다.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왜 이렇게 안 죽고 느이들 구찮게 하는지 모르겠다." 어머니 말씀의 행간에서 나는 민망함을 읽는다. 나이 든다는 것이 창피한 일인가. 세상 모든 사람들은 오래 살려고, 건강하려고, 운동도 하고 나쁜 음식도 안 먹고 건강검진도 하는데.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게 왜 부끄러운 일인가. 장수 집안이라고 하면 주변에서 다들 은근히 부러워하는데, 왜 장수하는 당사자는 이렇게 떳떳하지 못한가.


주변에서 노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나는 내 어머니와 나의 결말에 대해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조금은 덜 슬프고 편한 엔딩을 만들 수 있을까. 이별은 슬픈 일이지만, 조금 덜 슬픈 방식과 조금 덜 힘들 방법은 있지 않을까. 지금껏 살아오며 도움이 됐던 나의 잔머리가, 그 분야에도 역시 효과를 발휘해야 할 텐데. 언젠가 나도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실제적인 문제에 맞닥뜨리면,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어머니의 존엄을 지켜드릴 수 있을까. 어머니와 나는 끝까지, 서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


돌봄에 대하여, 사회에서 많은 이야기가 오고간다. 아이를 돌보는 것이, 노인을 돌보는 것이, 더이상 가족만의 의무가 아니라고 다들 이야기한다. 하지만 한 가족에서 아이를 돌보는 일이, 노인을 돌보는 일이 그렇게 반복해서 발생할 일은 아니다. 계절처럼 반복되지 않고, 그냥 그 시절은 딱 한 번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어떤 돌봄의 상황의 직면했을 때 경력자가 아니다. 베테랑일 수 없다. 어떡해야 하나 우왕좌왕 할 수 밖에 없다. 많은 시험에 들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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