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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nes Feb 05. 2023

아무튼 도서관

나는 대학에서 일한다.

지금 일하는 대학으로 출근한 지 햇수로 8년 차다. 사계절 캠퍼스를 거닐며 계절을 느끼지만, 나는 일하러 대학에 다니므로 학교 곳곳을 마음먹고 둘러볼 겨를은 없었다. 그냥 정문으로 들어 다니며 강의실 창문으로 내려다보며 캠퍼스를 느낄 수 있는 것, 나는 그것만으로도 아주 좋았다. 나에게 캠퍼스를 제대로 둘러볼 여유를 준 건 코로나였다. 코로나로 혼자 있는 시간이 많고 학교와 집 외 달리 어디도 가지 못하는 그 시절, 캠퍼스 곳곳을 홀로 누볐다. 처음 가 본 건물, 처음 가 본 언덕, 처음 가 본 오솔길. 학교 안에 이런 곳이 있구나 기뻐하고 이렇게 한적한 대학이 되었구나 슬퍼했다.


8년 만에 교내 도서관에 갔다. 나는 어느 지역에 가건 어느 동네에 가건 서점과 도서관을 제일 먼저 검색해 보는데, 이상하게 내가 일하는 학교 안 도서관에는 가 볼 생각을 못 했다. 일하는 건물에서 조금만 걸어가면(아주 약간의 언덕을 오르면) 있는 것을, 이렇게 시야가 좁았다니. 학교 근처 구립 도서관을 편의점 드나들 듯 들락거리면서, 책이 없다며 상호대차 서비스를 이용해 구내 모든 도서관의 책을 수집하듯 빌려다 읽으면서, 지척에 있는 이 도서관에 처음 오다니. 세상은 정말 넓은 것 같다.


도서관 게이트를 지나 서가에 들어가니, 여기저기 오후 3시의 밝은 햇살을 맞으며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아, 이런 모습이라니. 두근두근 여러 권의 책을 골라 캠퍼스가 내려다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자마자 생각했다. 이건 (적어도 나에겐) 최고의 직원 복지가 아닌가. 급할 때 쓸 연차가 없고, 마음 놓고 간식 하나 먹을 휴게실이 없고, 몇 십 년 된 뚱뚱한 데스크톱 컴퓨터를 사용하지만, 나에게 이건 일터가 줄 수 있는 최고의 복지다.


도서관 놀이는 고등학교 때 시작됐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근처 시립 도서관을 동네 별로 섭렵했고, 시립 도서관마다 휴관일을 외웠다. 자주 가는 도서관이 휴관하면, 먼 동네에 버스를 타고 다녔다. 대학에 들어가니 학교 안에 도서관이 여기저기 있었다. 꼭 공부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방앗간 드나들 듯 도서관에 갔다. 서가 사이를 어슬렁 돌아다니다가 내 마음에 드는 책상에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았을 때 느끼는 만족감.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도 많았지만, 도서관에서 있던 날들이 진심으로 좋았다.

어느 날 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창이 말하길, 나는 항상 책을 품고 다녔다고 한다. 항상 가슴에 책이 들려 있어서, 품고 다닌다 말했던 것 같다. 하긴 한동안 손바닥만 한 핸드백을 들고 다니느라, 책을 양팔에 들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서울 시내 유명 도서관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경기도 남쪽 끝에 살면서, 지하철을 그렇게 싫어하면서, 산 넘고 물 건너 정독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고 국회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찾았다. 막상 대학원에 들어간 후부터는 (잘 시간도 먹을 시간도 없어) 도서관에 다니지 못했지만, 대학원 입학 준비를 하면서 정말 많은 도서관을 찾아다녔다. 남들은 다 축구 볼 때, 남들은 다 불꽃놀이 보러 다닐 때, 그럴 때도 난 남산 도서관에 있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남산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밤늦은 시간 남산에서 내려오는 버스 안에서 '왜 오늘은 이렇게 버스가 한가하지'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아이를 낳고 나서 다시 도서관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항상 어린이 도서관이 먼저였고, 어린이 열람실이 먼저였다. 지금은 비록 어린이실에 붙박이처럼 있지만, 언젠가 저 위 일반 자료실과 열람실로 이 아이와 함께 올라갈 날이 있겠지. 도서관이 주는 기쁨을 이 아이도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얼마 전 리뉴얼을 끝낸 교내 도서관은 과거와 현재가 함께 있었다. 과거의 흔적으로 낡은 기둥과 낡은 책장과 낡은 엘리베이터가 그대로 있지만, 학생들 이용 공간은 여기가 어디 북카페인가 싶게 책상도 독서등도 의자도 예쁘고 편안했다. 개인실도 있고 회의실도 있고 창가 자리도 있고 노트북 자리도 있고 통화 부스도 있고. 저 자리 마다마다 다 한 번씩 앉아 봐야지. 수업이 끝나면 이곳으로 달려와 하루를 마무리해야지.

아니 사실은 현실은, 하루의 수업이 끝나면 다음 날 수업 준비를 해야 하고 숙제 검사를 해야 하고 행정 잡무를 해야 하고 무엇보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내 아이를 생각하며 서둘러 운전해야 한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운이 좋으면 일주일에 두 번이라도, 달려오고 싶은 곳이 일터 어딘가에 있다니, 행운이 아닌가.

이 도서관 덕분에 나는 당분간(아니 한동안, 오랫동안) 출근하고 싶은 삶을 살겠구나. 와, 생각만 해도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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