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역하게 지내던 작은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벌써 4년 전 일이다. 미리 준비한다고 마음이 달라지진 않았을 테지만 마음의 준비랄 것을 할 새 없이 급작스레 돌아가셨다. 우리는 모두 준비 안 된 죽음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내는 없었고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나에게 사촌 동생인 그 아이는 결혼해서 이제 막 아빠가 된 참이었다. 열여섯에 엄마를 잃은 아이는 20년을 아빠와 단둘이 지내고 서른여섯에 자기 가족을 꾸렸다. 아빠와 아들 단 둘이 지내는 인생은 그다지 달콤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세상에 너와 나 단 둘이라는 애틋함은 있었지만 자기가 아버지에게 즐거움을 주는 존재는 아니었던 것 같다고, 평생 자기 뒷바라지하시느라 아빠가 너무 고단하시다고, 그런 말을 자주 했다. 그러던 자기가 결혼을 해, 말랑말랑한 손주를 안겨드리고 나서야, 비로소 아버지에게 기쁨이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기쁨을 몇 해 누리지도 못하시고 가셨으니, 이 아이는 어떤 마음일지 가늠이 안 된다.
코로나가 등장하던 해 1월이니, 이제 4년 째다. 이제 마흔이 된 아들은 아직도 매달 아버지를 찾아다닌다. 유치원 생 딸과 만삭의 아내를 데리고, 아직도 한 달에 두 번씩(최소 두 번이라고 말했다) 아버지께 간다. 4년이라면 게을러질 법한 기간이고 잊혔어야 했을 시간인데, 아직도 한 달에 두 번 납골당에 간다니. 나는 상상조차 못 할 마음이다. 세월만 한 약이 없다고 했는데, 시간이 약이라고 했는데, 망각은 신이 준 선물이라고 했는데. 종교도 없는 아이가 아직도 그렇게 자주 내가 성당에 가듯 아버지께 간다면, 그건 종교가 아닌가.
가끔 아이에게 메시지를 보내곤 했었다(비록 몇 살 위 누나면서, 나는 한 가정의 가장을 아직도 '아이'라 부른다).
"나는 아직도 작은 아버지가, 살던 곳에 계속 살고 계신 것 같아. 추석이면 우리 집에 놀러 오실 테고, 가족 경조사가 있을 때는 어디선가 나타나 반갑게 나를 맞아 주실 것 같아. 그냥 어디선가 살고 계실 것 같아."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며 나와 우리의 슬픔을 함께 했었다.
그런데 아이가 아직도 납골당에 찾아다닌다는 소식을 들으니, 이 아이의 마음을 나는 평생 알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숭고하게까지 보이는, 그 아이가 지속하는 하나의 의식. 그것으로 아이는 살고 있을 텐데, 감히 내가 어떻게 그 마음을 알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