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잘 자야 하는 이유

백만 가지

by Agnes

나는 자는 것이 너무 좋다.

얼마 전에 아무튼 시리즈의 하나인 <아무튼 잠>을 읽으면서, 이건 거의 수면예찬의 바이블이 아닌가. 어쩜 이렇게 잠에 대한 오만가지 단상을 잘 풀어냈을까 감탄하며 읽었다. 세상에 이렇게나 잠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나는 그에 비하면 거의 인간 앞의 개미 수준이구나.


나는 잘 자기 위해 식욕을 포기할 수 있다. 가끔 너무 배고프고 졸리고 피곤할 때 나는 먹지 않고 잔다. 먹은 다음에 바로 자면 잠이 들 때까지는 흡족하지만 깨어난 후 속이 불편하기도 하고, 먹으면서 잠이 달아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그냥 배고픔을 느끼며 잔다. 어떤 욕구도 나의 수면욕을 이길 순 없다.


나는 낮잠을 아무리 자도 밤에 또 잘 수 있고, 낮잠은 항상 밤잠처럼 잔다. 기본 2시간. 15분, 20분 자는 건 아무래도 좀. 성에 안 찬다. 사실 그럴 거면, 그냥 커피를 한잔 더 마시고 잠을 미룬다. 커피만 마시면 나는 언제든 열정이 충만해지니까. 단, 자주 써먹어서는 안 된다. 진짜 밤을 꼴딱 새우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가끔 내 일상의 많은 순간을 '맑은 정신으로' 마주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 아이와 있을 때 더 에너지 있는 엄마이고 싶고 회사에서 일할 때 더 맑은 정신으로 리포트를 작성하고 싶다. 요리할 때 더 맑은 정신으로 요리를 즐기고 싶고 동료와 수다를 떨 때 좀 더 적극적으로 대화에 공감하고 싶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취미, 독서에 대한 것은 말할 필요 없이 더욱 그렇다. 한 장을 읽더라도 반짝반짝 맑은 정신으로 읽는다면, 이메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또렷한 정신으로 읽을 수 있다면, 삶은 정말 달라진다.


그래서 나는 인생의 많은 순간을 맑은 정신으로 마주하기 위해, 많은 잠을 잔다. 가끔 거실에 빨래가 쌓여 있고 설거지통에 설거지 거리가 쌓여 있는 그대로 자는 나 자신을 보며 너무 게으른 거 아닌가 죄책감이 들기도 하지만,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은 언제나 어디서나 백만가지다. 그래서 일단 잔다. 그리고 한결 맑아진 정신으로 많은 것들을 정성껏 해낸다.


아주 하기 싫은 일에 직면했을 때에도, 맑은 정신이 혼미한 정신보다 훨씬 낫다. 피곤한 상태라면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사태가 악화될 수 있겠지만, 맑은 정신이라면 최선의 내가 나온다.


중고등학교 시절 일주일 씩 이어지는 시험 기간에도 항상, 일단 자고 일어나서 공부를. 긴 여행 후 집에 돌아왔을 때 할 일이 산더미더라도 일단 자고 일어난 후에 짐 정리를. 여기저기 연락하고 예약하고 소통할 일들이 산재해 있어도 일단 좀 자고 나서.


그럼 나는, 뭐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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