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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nes Apr 09. 2023

어머니에게 달력이란

우연히 나에게 찾아온 책들이 있다.

책 소개 광고글을 읽다가, 팟캐스트를 듣다가, 서점에 비치된 책을 둘러보다가 등등 '무엇을 하다가'가 아니라, 그냥 어떤 책이 나에게 올 때가 있다.


영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에서 독자에게 책 선물을 하려고 서점에 간 작가를 보았다. 작가는 책을 고르며 생각한다.
'책에도 귀소본능이라는 게 있어서 어울리는 독자를 찾아간다는데 사실이라면 즐거운 일이지요."
나도 필요한 누군가 읽어주길 바라며 책을 썼다. 내가 쓴 책은 어딘가로 떠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돌아간다고 믿는다.

- 고수리, <마음 쓰는 밤>(미디어창비 2022) 10면 서문 中


정말 책에게도 귀소본능이 있는 걸까. 이렇게 찬란한 봄에, 나에게 찾아온 책들이 몇 권 있었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한 출판사의 창립 기념일 이벤트에 당첨되어 10권의 책을 선물 받았다. 이벤트 신청도 좀처럼 없는 일이고, 당첨 또한 힘든 일이어서 정말 이 봄날에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기뻐하며 아껴 가며 눈으로 마음으로 읽고 있다. 받은 책은 에세이가 대부분인데, 만화가 한 권 있었고 시집도 한 권 있었다. 나는 에세이를 좋아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시집은 '독파' 우선순위에서 밀리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단, 만화는 중학생 아이에게 추천해 주려고 가장 먼저 뚝딱 읽고 '꼭 읽어 봐' 말하고 넘겨줬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우연히 침대에 가져갈 책을 찾다가, 너무 졸리고 피곤하니 시집을 가져가 보자 해서 시집을 집어 들었다. 시집은 처음부터 읽지 않고 중간을 펼쳐 읽는 게 제맛이니까, 라며 중간 어디쯤을 펼쳤는데, 그 시가 있었다.


달력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지 마라
어떤 기념일도 앞으로 없으니

삶의 빈터를 맨손으로 지켜야 할 뿐
......(중략)

- 김정숙, <햇살은 물에 들기 전 무릎을 꿇는다> (책나물 2021) 26면


나는 시는 잘 모르는데, 읽어본 적도 많이 없는데, 시가 이런 거였구나. 어느 한 구절만으로 훅 들어오는, 그 구절을 반복해 보게 되는, 짧지만 거듭 펼쳐 보게 되는. 시집이 그런 거였구나.


어머니와 헤어질 때마다 어머니가 반복해하시는 말씀. "어버이날에 오지 말어. 추석에 오지 말어. 엄마 생일에도 오지 말어." 설날에 서너 달 뒤인 어버이날을 말하시고, 어버이날에 반년 뒤인 추석을 말하시고, 추석에는 또 서너 달 뒤 (연말에 있는) 어머니 생일을 말하시는 레퍼토리. 90 노인의 일상에 기념일이란 연중 큰 명절 두 번과 어버이날과 본인 생일. 이렇게 딱 네 번을 중심으로 한 해가 가나 보다.


어머니가 예뻐 마지않는 어머니의 막내 손주 내 아들은, 올해 중3이다. 아이가 언제 대학을 가느냐고 물으시더니, 그때 엄마 통장에서 얼마를 꺼내 축하금으로 주라고 신신당부하신다. 5년 뒤 일을 이렇게까지 미리 당부할 일인가, 이상한 마음이 들면서도 재차 묻지 못한다. 어머니도 나도, 왜 그러시는지 짐작하고 있으니까.


결혼하던 첫해 어머니가 내 생일을 물으셨다. 그리고 생일 때 전화가 왔었다. 결혼하고 에미 첫 생일이라 축하한다고 말하고 싶으셨다고 했다. 내가 결혼할 때부터 이미 많이 노인이었던 어머니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생일 축하 인사였다.


어머니 댁에 걸려 있었던 달력이 기억난다. 무려 90년대 달력. 인생의 많고 많았던 대소사가 모두 끝나고 기록할 기념일이 없는 달력. 그 쓸모를 다 한 달력. 그러므로 바꿀 이유가 없는 달력. 그래서 어머니의 달력은 어머니 나이 70 언저리에서 멈추었나 보다.


찾아보니 시인의 나이가 황혼이다. 시를 쓰는 마음이란 슬프면서 기쁜 일일 텐데. 황혼으로 달려가는 나이에 있는 내가 시인의 글에 이렇게나 마음이 움직였다면, 시인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려나.


그리고 또 내가 이 시를 읽고 어머니의 마음을 알게 됐다면, 어머니의 마음이 되어 서글펐다면, 어머니에게는 위로가 되었으려나, 그건 확실하게 아니다. 내가 어머니를 이해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머니의 고독한 인생에 도움은 되지 않는다. 그냥, 그뿐이다. 어찌할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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