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라디오를 듣는데 진행자가 웃음에 대해 말했다. 웃음이 주는 효과에 대해 말하면서, 자기는 큰 병으로 많이 아팠을 때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견뎠다고 했다. 많이 웃은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그때 내 삶에 대해 생각했다. 한국어를 가르치며 많이 웃게 된 내 삶에 대해.
한국어 교사는 곤란한 것이 많은 직업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일하고, 자격 명칭이 '교원'이지만 학교에서는 우리를 가르치는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대학들이 매일 출근해 매일 수업하는 한국어 교원들을 3개월 단기 계약직으로 고용하고 있다. 딱 10주 동안만 고용이 보장되는 삶. 고용이 늘 불안정한 삶. 복지라던가 근로자로서 받을 수 있는 마땅한 권리는 주장하기 어려운 삶.
많은 곤란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삶이 참 좋다.
20대에 시작해 10년 넘게 종사했던 삶에는, 웃음보다는 눈물이 많았다. 자주 웃고, 자주 화내고, 가끔 울었다. 자주 웃었지만 실소가 많았고 진정 웃기고 재미있어서 웃은 적은 없었다. 나는 내가 편해지려고 웃었고 웃으면 나아질까 싶어 웃었던 것 같다. 어떤 협상에 앞서, 웃는 얼굴엔 침 뱉지 못하니 전략적으로 웃었던 것도 같다.
직계 가족의 경조사 또는 응급 상황이 아니라면 연차조차 쓸 수 없는 삶이지만, 교실 밖에서 빈번히 자존감 떨어지는 삶이지만, 교실 문을 닫고 들어가면 그 안에서 나는 온전히, 행복하다. 가끔은 내가 수업 속으로 도망가는 기분이 느껴질 때도 있다. 팬데믹 동안에는 더욱 그랬다.
언젠가 내가 한국어를 가르친다고 말하니, 지인이 그런 말을 했다.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아이들이 사랑스러운 만큼 잘 지도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따르고, 중고등학생들은 기본적으로 사춘기 아이들이어서 예민한 구석이 있는 데다가 서로 학업 스트레스가 있는데, 다 큰 성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은 자기가 좋아서 공부하는 학습자들일 테니 얼마나 즐겁겠냐고. 게다가 말을 배우는 게 주된 수업의 목적이라면 정말 재미지겠다고. 그리고 얼마간은 성취도에서도 자유로울 테니 진정 가르치는 직업 중에서는 최고의 자유도를 느낄 수 있겠다고. 그때까지 내 직업에 대해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한 적이 없었던 나는, 지인의 그 설명에 명쾌함을 느꼈다. 명쾌한 기분 좋음과 자유로움.
그리고 사실, 한국어를 가르친다는 사실 만으로도 나는 내 직업이 매우 신비롭다. 영어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배워야 마땅한 언어였고, 그래서 영어를 가르친다고 하면 조금 많이 부러웠다. 나는 몇 십 년째 배우고 또 배우는 입장인데, 얼마나 어떻게 하면 영어를 비로소 가르칠 수 있을까. 영어 선생님들은 인생의 숙제 하나를 해버린 기분이겠다 싶었다. 그리고 세상이 바뀌면서 배워 마땅한 언어는 프랑스어로, 일본어로, 중국어로 계속 이동해 갔다. 그런데 이제 한국어가 그렇다. 나는 한국어 네이티브 스피커다. 한국어를 배우는 것이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세상이지만, 여전히 나는 신비로운 직업의 소유자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은 매우 천진하고 호의가 가득하다. 특히 초급일 때 그렇고, 중급 고급으로 올라가면서 좀 퇴색되기는 한다. 뭐든 새것과 처음이 좋은 것과 같은 이치다. 잘 모를 때, 익숙해지기 직전, 그 가슴 뛰는 신비로움.
10주마다 새로운 학생들을 만난다.
10주마다 나는 새로운 환대를 받으며 나도 그들을 환대한다. 그저, 많이 웃을 준비를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