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공부고 뭐고, 마음은 콩밭에

by Agnes

현장학습을 다녀왔다.


어학당에서는 분기에 한 번씩 현장학습을 간다. 소풍 가듯 산책 가듯 설레며 간다. 목적지는 다양하다. 정말 고궁이나 놀이공원 같은 곳에 놀러 갈 때도 있고, 한국 문화 체험 수업을 받을 때도 있다. 초급 학생들은 태권도나 부채춤 같이 몸으로 할 수 있는 것, 부채 만들기나 인장 만들기처럼 직관적으로 따라 할 수 있는 것을 주로 한다. 계절에 따라 한국 문화를 볼 수 있는 박물관이나 고궁에 가기도 한다. 중급부터는 공연을 보러 가기도 하고 한국 음식을 직접 만들러 가기도 한다. 적극적으로 한국어를 듣고 이해할 필요가 있는 뮤지컬이나 연극 등 공연 관람은 고급 학생들이 주로 간다.


팬데믹 기간 동안 이 모든 것들이 중단되었다. 우리가 다시 현장학습을 갈 수 있을까, 현장학습은커녕 학교에도 못 오는데, 입으로 말하기조차 절망적이었는데. 지난가을 드디어 현장학습이 재개 됐다. 급마다 꼭 한 두 명은 9시 등교 시간에 현장학습 장소가 아닌 학교에 도착해 "왜 학교에 사람이 없어요?" 선생님에게 전화를 하기도 하고, 비슷비슷한 지하철역 명을 헷갈려 서울 반대 방향에 도착해 있기도 하지만, 현장학습 날은 분명 우리 모두 설레고 즐겁다.


이번 학기에 내가 가르치는 초급 학생들은 부채 만들기를 체험하러 다녀왔다.


접었다 '촤라락' 펴는 전통 스타일 부채에, 멋지게 그림을 그리고 한글 캘리그래피를 써서 각자 자기만의 부채를 완성하는 게 오늘의 임무다. 현실은 다들 소형 손풍기를 가지고 다니지만, 신기한 눈으로 부채를 만져보고 "촤라락" 사극 주인공처럼 부채를 접었다 폈다 하고 왁자지껄 난리다.


캘리그래피 선생님은 처음에는 줄 긋기, 다음은 한글 쓰기, 그다음에는 단어 쓰기, 마지막에는 마음에 드는 문구 쓰기까지 천천히 난이도를 올려가며 학생들이 따라오게 지도한다. 드디어 각종 K팝 가사가, 캐릭터 그림이, 인생 명언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온다. 감탄의 감탄을 연발하며 다른 반 학생들의 작품을 둘러보는데, 우리 반 분위기가 이상하다. 아무도 열심히 쓰지 않는다. 그림도 안 그린다. 그저 웃고 있다. 사실, 우리 반 학생들은 오늘의 하이라이트를 기다리는 중이다. 동대문에 몽골 음식을 먹으러 간다며 뒤풀이만 기다리는 눈치다. 여기까지 와서, 강남까지 와서, 한국어를 듣고 쓰고 읽을 마음이 없다. 마음이 콩밭에 있다. 왜 안 그럴까.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외국어는 사실, 소음이다. 오늘 만큼은 머리 아프게 (한국어 선생님 말 보다 훨씬 빠르고 어려운) 캘리그래피 선생님이 하는 말을 듣고 싶지 않고(사실 초급이어서 일반인의 한국어는 아직 잘 들리지도 않고), 얼른 다 끝내고 친구들이랑 우르르 2차를 가고 싶은 거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 백지상태의 부채를 들려 보낼 수는 없으니... 묘책을 생각했다.


한국어 말고, 자기 나라 말을 쓰게 하자


나는 내 시나리오대로 움직였다.

1. 빈 종이에 (뻔뻔하게) "선생님, 사랑해요."를 쓴다.

2. 학생들과 다 같이 '큰 소리로' 읽는다.

3. 내가 쓰고, 내가 읽으라고 해 놓고, "여러분, 고마워요."라고 말한다.

4. 그리고, "이 말을 여러분 나라 말로도 써 주세요."라고 종용한다.


그 결과 나는 이런 종이를 받아 냈다. 기쁘다.

학생들에게 받아 낸 내 야심작. "선생님, 사랑해요" 10개 국어 버전


이게 뭐라고. 다들 예쁘게 쓰고 싶다며 다른 종이에 연습하고, 그새 모국어를 잊었다며 핸드폰에 검색해 보고, 이게 맞는지 모르겠다며 같은 국적 친구에게 확인하고, 서로 소리 내 읽어 보라고 하고, 듣고는 소리가 예쁘다며 따라 하고, 틀렸다며 다시 가르쳐 주고. 다들 신이 났다. 그리고 이걸 시작으로 모든 부채에 모든 나라의 언어가 등장했다. 국가 이름, 자기 이름, 인사말, 사랑해요, 좋아하는 아이돌 이름, 등등등.


그리고 마지막에는, 여러분이 준 선물 고맙게 잘 받겠다는 '정말로 연극적인' 선생님을 가운데 앉히고, 종이를 들고, 단체샷.


내 자랑은 집에 와서까지 이어진다. 내가 돌리고 내가 쓰라고 해 놓고는, 아이에게 자랑한다. "엄마 학생들이 써 줬어. 이거 어느 나라 말 같아? 신기하지?" 남편에게도 자랑한다. "우리 학생들이 써 준 거야. 부럽지? 학생들 너무 귀엽지?"


이 더운 여름에, 내 인생에 이런 학생들이 있어서 나는 참 좋다.

나도 학생들에게, 학생들이 '참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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