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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nes Jul 28. 2024

매일, 잘 지내냐고 묻는 나의 학생이 있어서

나는 수업 시간이 되기 훨씬 전에, 일찍 교실에 도착하는 편이다. 일찍 도착해서, 마찬가지로 일찍 도착한 학생들과 담소도 나누고, 30분 전까지 다른 수업이 진행된 교실 환기도 시키고, 여유롭게 전자 칠판 세팅도 한다. 혹시 놓고 온 것이 있더라도 다시 연구실에 다녀올 수 있는 정도의 시간, 그 정도의 여유는 만들고 싶어서다. 모든 세팅이 끝나면 마지막으로 마이크와 스피커를 켠다. 작은 교실이지만 워낙 성량이 작은 나에게 마이크는 꼭 필요하다. 박물관 역사 해설가가 쓸 법한 헤드셋 마이크, 내 수업 필수템이다.


첫 사용은 코로나 때였다. 나는 가뜩이나 목소리도 작은데 마스크까지 쓰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기분이 되어 급하게 무선 마이크를 구입했다. 한동안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선생님들이 동일한 모델의 마이크를 구입했는데, 가끔 옆교실 주파수가 잡히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무선 마이크이고 제조사가 독점이다 보니, 내 마이크 주파수가 옆 교실 스피커와 싱크가 걸리는 것이다. 반대로 내 스피커에서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나오고. 그럼 '귀신인가?' 학생들은 웅성거리고. 하지만 그것도 어느 순간 해결 방법을 찾았고, 이제 마이크 없이 수업을 할라 치면 뭔가 불안한, 그런 상태가 되었다.


그날 나는 마이크를 켜자마자, 작은 한숨을 쉬었다. 요즘 날이 너무 더워서 그랬는지, 새로운 스트레스가 많아 그랬는지, 그냥 피곤해서 그랬는지. 아무튼 내가 작게 쉰 한숨은 마이크를 타고 나가 큰 한숨이 되어 버렸다. 아차 싶었는데, 일찍 교실에 와서 앉아 있던 한 학생이 그걸 듣고 날 쳐다보더니 하던 말


선생님, 잘 지내세요?


응? 하하. 그럼요, 잘 지내요. 그런데 너무 더워요. 멋쩍은 내 횡설수설을 듣고 학생도 "좋아요." 한 마디 한다. 학생은 힘들어 보이는 내게 "괜찮아요?"라고 묻고 싶었을 거다. 그리고 내 대답을 들은 후에는 "good"이라고 말한 것이리라. 열아홉 대학생이 보기에 나는, 어땠을까. 노동에 지친 중년의 아줌마 선생님이었을까. 생각해 보니 그 학생은 내게 자주 "잘 지내요?"라고 물었다. 한국어 초급 학생들은 맥락 없는 말을 잘도 하기 때문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었는데. 그때마다 그는 나의 안부를 물어준 거였다. 깜짝 놀랄 만큼 다정하게.


호의 어린 눈과 호의 가득한 몸짓. 한국어 교실에는 그런 학생들이 그득하다. 물론, 적개심 어린 눈과 적개심 가득한 몸짓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후자보다 전자가 많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내가, 한국어교사로서 사는 게 아닐까. 초급 학생들을 가르칠 때, 나는 교실에 호의와 적의가 공존함을 느낀다. 한국이라는 낯선 곳에 뚝 떨어져서 공부를 하겠다고 앉았는데, 나는 '가나다'도 모르고 '안녕하세요'도 모른다. 이 낯선 학교, 낯선 교실에 내 나라 사람은 나 혼자다. 타인들이 주고받는 영어도 나는 모른다. 만약에 내가 그런 경우라면 어떨까. 이 용기 백배한 학생들이 때때로, 적개심을 갖게 되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다. 학생들이 종종 엄마가 보고 싶고, 종종 고향의 강아지가 보고 싶다고 말하는 이유를, 나는 묻지 않아도 이해한다.


고슴도치 같이 적개심 가득한 학생을 만나고 온 날은, 그 시선과 목소리를 받아내고 온 날은, 호의 어린 눈빛만 봐도 마음이 녹는다. '아, 이거였어. 이런 게 있었어.' 다만 한 순간 궤도를 이탈했을지언정, 대다수가 나를 바라보는 눈길엔 호의가 그득하다. 호의와 적의가 공존했던 초급 학생들은 언젠가 중급이 되고 고급이 된다. 호의도 반짝거리고 적의도 반짝거렸던 학생들은, 한국어와 한국에 익숙해지면서 호의도 적의도 희미해진다. 적의가 사라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호의가 함께 사라지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미지근해진다고 해야 할까. 날카로움이 사라지면서 호의도 호기심도 함께 사라진다. 나는 초급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왠지 그 순수함을 지켜주고 싶어 진다. 어른들이 순수로 똘똘 뭉친 아이들을 지켜주고 싶어 하는 것처럼, 삐약삐약 학생들을 지켜주고 싶다.


그런데 그러한 마음은 학생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노동에 지친 선생님의 안부를 매일 물어주고, 쉬는 시간에 어서 가서 쉬라고 말해주고, 맥락 없이 미안하다고 자주 말하는 걸 보면, 그렇다.


초급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확실히, 힘들다, 체력적으로. 하지만 확실히, 덜 지친다, 정신적으로. 적은 말로도 진심을 전할 수 있고 오해가 적다.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진심을 더 많이 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오해가 안 생기는 것도 아니므로. 진심을 전할 용기만 있다면, 의지만 있다면, "좋아요" 또는 "괜찮아요?" 한 마디만으로도 충분하다. 내가 이렇게 "잘 지내세요?" 한 마디에 마음이 녹는 것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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