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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nes Jul 18. 2024

병원 생활자의, 짧은 소회

눈을 감았다 뜨니, 집에 암 경험자가 두 명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 가족은 많은 것이 달라졌다. 나는 작년 여름 이후 계속 꿈을 꾸는 기분이다.


아빠와 나는 "암일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라는 말을 세 번 들었고, 세 번째 의사에게 수술을 받기로 결정했다. 세 번째 의사도 동일하게 말했지만, 세 번째 의사는 '어려운 수술이다'라든가 '복잡하다'라든가 '만약의 경우 중환자실에' 등의 말은 하지 않았다. 세 번째 의사는 '아주 나쁜 암은 아니다.'라든가 '제가 잘 마무리하고 나올 테니 걱정하지 마시라'라든가 '완치 확률이 매우 높은 암이다' 등의 말을 신뢰감 있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젊었을 담배를 30년간 피웠어요."라는 아빠의 말에 "그럼 끊으신 지도 30년 되셨네요."라고 말해 주었다. 우리는 그 말이 무척 고마웠다.


경력 많고 저명한 의사는 생각보다 젊었다. 병원 프로필 사진이 젊을 적 찍은 사진이겠거니 했던 나는 사진과 동일하게 젊은 의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빠도 진료 후 말하기를 "야, 너네랑 나이가 비슷해 보인다."라고 말하시며 놀랐고 나는 "아냐, 나보다 젊어 보이는데"라고 말했다. 이제 병원에 가면 자주, 의사가 나보다 젊다. 5년 전 남편의 턱 수술을 해 줬던 치과 교수님은 누가 봐도 우리보다 젊었는데, 그보다도 젊어 보였던 담당 전공의는 "군대 가야 해서 다음 진료일에 오시면 저는 없을 거예요."라는 재미있고 신기한 말을 해 주었다. 그때 생각했다. 이제 우리도 나이가 들었구나. 항상 나보다 나이가 많아야 했던 직군의 사람들, 이를테면 의사, 교수, 부동산 사장님. 이런 사람들이 나보다 연배가 낮아진 걸 느낄 때, 그럴 때 나는 좀 민망해진다. 내가 좀 더 점잖아야 할 것 같고 내 나이에 맞는 무언가를 갖추어야 할 것 같아서다.


지은 지 얼마 안 된 병원은 시설이 매우 좋았고 무엇보다 전망이 좋았다. 아빠가 머물렀던 11층과 12층에서는 어느 쪽이고 산이 보였다. 초록초록한 산과 나무가 통창으로 보이고, 창문을 살짝 열어 두면 바람도 솔솔 들어왔다. 창 쪽 사진만 보면, 병원이라기보다는 강원도 어디 콘도에 여행 온 기분이었다. 그런 것들은 환자와 보호자에게 매우 위로가 된다. 아무리 시설이 좋아도, 아무리 깨끗하게 닦고 쓸어도, 어쩔 수 없이 병원이 뿜어 내는 공기가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들이 예쁘고 좋다면 잠시 잠깐 씩이지만 기분이 좋아진다.


병원 로비와 상업 공간에는 각종 프랜차이즈 카페와 식당과 잡화점이 즐비했다. 언젠가 깨달은 것이, 모든 대학병원에는 잡화점이 있다. 옛날로 치면 양품점 느낌의 잡화점, 거기에는 좀 병원이라는 공간과 안 맞다 싶게 화려한 옷과 모자와 신발 등이 있다. 처음 봤을 때는 '이런 잡화점이 병원에 왜?'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제는 안다. 왜 컬러풀한 원피스와 바지와 블라우스 같은 것이 거기에 놓여 있는지. 그리고 생각한다. 사장님은 의외로 장사가 잘 될 수도 있겠다고. 이 공간이 병원에서 오래 살아야 하는 보호자와 환자들을 위한, 작은 이벤트가 되어 줄 수 있겠다고도.


병원에서의 첫 끼니를 먹던 날, 아빠가 밥을 먹다가 말고 나에게 물었다. "민선아, 그럼, 내가 암 환자니?" 나는 불쑥 기습 공격을 당한 기분이 되어 "그럼 맞지 뭐. 암 환자지. 왜?"라고 물으니, 아빠가 하는 말. "아니 그럼, 이제 평생 술도 못 마시나 싶어서. 그럼 무슨 재미로 사냐." 역시, 소주 한 잔, 막걸리 한 잔을 삶의 낙으로 여기시는 아빠답다. 이 시점에 술타령이라고 아빠도 나도 하하하 웃어 버렸지만, 나는 오래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순간의 아빠와 나를. 그래서 벌써 이렇게, 쓰고 있다. 자꾸 그날의 대화가 생각이 나서.


넓디넓은 병원. 병실에서 나와 병동을 가로질러 녹지 공간 '치유의 숲'까지 가는 길. 복잡한 여정에 익숙해질 무렵, 하루 1.5만 했던 걷기 운동에 적당히 익숙해졌을 때, 다행히 아빠는 퇴원을 하셨다.  


병원에 가면, 모든 감정들이 눈에 보인다. 의료진들의 환대와 친절, (같은 병실을 쓰는)보호자들의 공감과 위로, 아픈 환자들의 슬픔과 분노. 그 모든 감정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곳. 평생 안 가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점점 더 많이 가게 되는 곳. 병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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