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화 작가님의 <유럽 책방 문화 탐구> 북토크에 다녀왔다.
책의 부제는 <책 세상 입문 31년 차 출판평론가의 유럽 책방 문화 관찰기>. 나는 유럽을 잘 모른다. 잘 모를뿐더러 장차 내가 갈 해외 여행지 후보에 유럽이 있었던 적이 없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비행기. 나는 비행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관심을 두지 않아서인지 유럽 곳곳의 책마을 이야기, 서점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 동네책방의 역사 등은 내게는 하나같이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었다. 작가님이 보여주신 자료 사진 중 내가 알아본 것은 고작해야 해리포터에 나오는(호그와트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유럽 어느 도서관, 영화 노팅힐에서 휴 그랜트가 운영했던 런던의 한 책방 정도였다.
국내 여행이라면 반드시 소도시의 동네 책방을 한 두 개쯤 여행 코스에 넣는데, 해외에서는 사실 별로 열정이 돋지 않는다. 나는 능통한 외국어도 없고, 내가 주로 다녔던 동남아 국가들의 경우는 더더욱 서점을 찾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띄엄띄엄 제목을 읽는 정도일 텐데, 매력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럽 곳곳의 사진들, 특히 서점의 사진들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빠져들듯 사진과 작가의 경험을 듣던 중 한미화 작가님이 말했다. "언어를 몰라도 그림책은 볼 수 있지요. 그러니 해외여행할 때 책방을 한 번 가 보세요." 아. 나는 깊은 깨달음을 얻은 기분이었다. 그림책이라면. 그렇다면 정말 얼마나 이국적이고 신비롭고 이색적일까. 실제로 북토크에 다녀와서 나는 종종 '유럽에 한 번쯤 가 보고 싶다.' '한미화 작가님이 추천한 나라 별 "책방 중심 여행 코스"도 한 번쯤 가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불쑥불쑥했다.
사람을 추억할 때, 곧장 떠오르는 대표 이미지가 있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리자면, 시골집 툇마루를 힘겹게 올라오며 "민선이 왔냐."라고 투박한 사투리로 말하는 장면. 지금 요양병원에 계신 외할아버지를 떠올리자면, 은발의 머리와 이마를 훔치며 "오, 그러냐?" 상대의 말을 맞장구치는 모습. 그런 모습들.
내 어머니를 떠올릴 때 떠오르는 모습 중 하나는, 책장을 넘기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집안일을 다 끝내고 나서, 제사 음식을 다 해치우고 나서, 바닥을 다 훔치고 나서, 그러고 나서 시간이 남는 어느 때. 어머니는 종종 그림책을 보셨다. 우리집도 큰집도 아이가 한창 그림책을 읽을 때여서, 그림책이 발에 밟힐 때였다. 저녁이라면 텔레비전을 보셨겠지만, 끼니 때라면 다음 끼니 준비에 여념이었으셨겠지만, 그렇지 않은 어떤 때에는 항상 그림책을 보셨다.
어머니는 글을 모르신다. 남편과 나는 너무나도 무료한 어머니가, 그저 습관적으로 책장을 넘기는 거라고 생각했다. 텔레비전에 재미난 프로그램이 하지 않는 평일 낮이어서, 그저 무료해서, 그저 어색한 시간을 넘기기 위해서 그림책을 보시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내가 외국어로 된 그림책을 볼 생각에 설레는 것처럼, 어머니께서는 글은 모르시지만 책의 분위기와 그림들의 맥락을 보면서 뭔가를 '읽으신 것' 아닐까.
지금의 나라면, 어머니와 함께 그림책을 보면서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함께 이야기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라면, '어머니 이 책에서 무얼 보고 계신가요?' 물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하릴없는 어느 때 어머니가 그저 눈앞에 지천으로 쌓인 그림책 중 하나를 주워 든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저 텔레비전의 대체재로서, 손이 노니까 집어든 거라고만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뭘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