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딸의 북토크에 참석한 78세 아빠

by Agnes

내 인생에 네 번째 북토크였다.


첫 책이 나오고 나서 첫 북토크에는 내 언니가 사회자로 함께 해 줬고, 두 번째 북토크에는 아이가 등장해 작가의 아들이 된 아들의 소감을 나눠 줬다. 세 번째 북토크에는 사촌 시누이(이른바 여섯 번째 시누이)가 큼지막한 대추를 한 아름 들고 와 응원을 해 주었다. 매 번 응원해 주는 가족과 지인들이 있었고, 내 남편은 항상 동행했다. 여기저기 등장해 물건을 나르고 선물을 증정하고 짐을 들어주는 남편을 보고, 출판사 대표님이냐고(또는 직원이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는, 내 책 출간과 출간에 따르는 여러 이벤트를 잔치처럼 즐겼다.


작년과 올해 사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작년과 올해 사이에 가족들이 번갈아가며 아팠다. 우리는 회복했지만, 아니 회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회복하지 못했다. 애도는 끝나지 않고 있고 한 번 아픈 몸은 아프기 전의 몸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한 번 불행을 겪어 버리면 불행이 오기 전의 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상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그러던 중 내 책 출간이 우리 가족에게 잔치가 되어 주어서, 파티가 되어 주어서 불행 중 다행이다 싶은 나날들이다.


집 근처 책방에서 두 번째 책 첫 북토크가 잡혔을 때, 이번에는 부모님을 모셔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아빠는 그런 문화에 어울리지 않지만 또 안 어울리지도 않는 분들이다.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 아들도 부르고 언니도 부르고 온갖 지인들도 다 부르면서 부모님을 부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쑥스럽기도 하고 이게 뭐라고 부모님 오시게 해서 부담스럽고 지루하게 하나 싶어서 그러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 쓴 책 <노년을 읽습니다>에는 내 아빠 이야기가 매우 많이 나온다. 첫 책 <연애>가 시어머니 이야기였다면 두 번째 책 <노년을 읽습니다>는 내 주변의 모든 노인들의 이야기다. 내 아빠 이야기도 종종 나온다. 그러니까 이제 내 아빠는, 완연한 노인이 된 것이다. 엄마는 아빠와 나이 차이가 다섯 살이나 나니까, 아직 덜 노인이어서, 덜 등장한다.


첫 책은 여기저기 사서 나르고 계모임에 곗돈으로 사서 뿌리고 회사에도 뿌리고 난리 더니, 이번에는 엄마 아빠 모두 잠잠하다. 나는 엄마 아빠에게 "초심을 잃었어"라고 말하면서 은근 진짜 작가가 된 척했다. "이제 뭐. 두 번째니까 별로 덜 재미있고 덜 신기하지?" 이러면서.


엄마는 진즉 내 책을 다 읽었고 두 번째 읽고 있다고 했다. 내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할머니 이야기도 많이 나오니까, 관련해서 또 다른 에피소드를 말해주기도 했다. '앗. 이건 다음 책에 쓰라고 또 말해주는 건가?' 이런 생각을 속으로만 했다. 아빠는 돋보기로 읽어야 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진도가 안 나간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아빠, 내 책 다 읽었어.?"라고 물었을 때 아빠는 "57쪽까지 읽었다."라고 대답했다. 이런. 이렇게나 정확한 아빠라니.


북토크에 참석해서 어색한 듯 감동받은 듯 졸린 듯 앉아 계시던 두 분에게 책방 지기님이 돌발 질문을 했다. 마이크를 가지고 다가가면서 "아버님, 한 마디 하실 말씀 없으신가요? 딸이 이렇게 아빠 이야기랑 집안 어르신들 이야기로 책을 썼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아빠는 진짜 당황을 하면서, 손을 휙휙 내저으면서 말했다.


내가 마음은 있어도, 표현을 못 합니다.


북토크가 끝나고 나서 엄마 아빠는 당연히 우리 가족이 다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가는 줄 아셨나 보다. 그런데 우리는 책방 가족들끼리 뒤풀이가 예정되어 있었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나의 마음속 베이스캠프가 되어 준 책방 가족들과 함께, 우리는 오랜만에 다 같이 맥주를 마시러 갈 예정이었다. 아빠는 그 이야기를 듣고 아빠의 트레이드 마크인,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액션을 하셨다.


여기, 카드 가지고 가서 이걸로 먹어라.


마흔도 끝자락인데, 나는 좀 몸 둘 바를 몰라하면서도 너무 신이 나서 아빠 카드를 받고 말았다. 그리고 정말 호프집이 떠나가라 웃고 즐기고 아빠 카드로 술값을 내고. 다 같이 모여 영상을 찍었다. "아버님, 잘 먹었습니다!"라는 멘트와 함께. 찬란한 중년들이다.


다음 날 아빠에게 아빠 카드를 주러 가서 말했다. 정말 잘 먹었다고. 정말 재미있었다고. 아빠는 생각보다 별로 돈이 안 나왔더라면서(아빠는 카드 사용료가 문자로 오는 걸 꼭 확인하신다), 북토크가 뭔지 가기 전에 인터넷에 검색을 해 봤다고 하셨다. 그리고 북토크에 오기 전 내 책을 가방에 담으셨다고. 엄마가 "자기는 왜 민선이 책을 챙겨?"라고 물었을 때, 아빠는 당당하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다 찾아봤어. 책을 가지고 가는 거야."


그렇게 책을 챙겨 오신 아빠는, 낭독이 시작되었을 때 능숙하게 가방에서 책을 꺼내더니 딱 그 페이지를 펼쳐서 함께 읽으셨다. 마치 북토크에 많이 다녀 본 사람처럼 의연하게. 막상 책을 두 번이나 읽은 내 엄마는 멀뚱멀뚱 이 냥반이 뭘 하나 싶은 눈으로 아빠를 쳐다봤지만.


내가 작년의 나보다 한 살 나이 든 지금의 내가 더 좋은 건, 이런 일들이 있어서다. 이런 일들이 내 인생에 일어나고 있어서 조금 더 낡고 지친 몸과 조금 더 안 좋아진 상황들을 견뎌 낼 수 있다. 그리고 또 미래를 희망하고 낙관할 수 있다. 모두 책 덕분이고 글 덕분이다.


모두 읽고 쓰는 일들 덕분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