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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갑고 무람없는 나의 외국인 학생들

by Agnes
여러분. 발표하기 전에 다들 긴장되지요? 긴장을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의 주제는 발표하기였다. 발표 주제를 정하는 법, 발표 준비하는 법, 발표하는 법, 다른 사람의 발표를 듣는 법. 순서에 따라 학생들의 스키마를 활성화시키고, 브레인스토밍 방식으로 툭툭 생각을 내던지게 하던 중이었다. 그때 요즘 우리 반 최고의 장난꾸러기 학생이 대답했다.


술을 한 잔 하면....


그런 대답이 나올 때마다 학생들은 까르르 깔깔 너무 신이 나서 웃는다. 낙엽만 굴러가도 웃는 고등학생들처럼. 뭔들 안 재미있을까. 학생이 저렇게 대놓고 웃자는 대답을 할 때, 교사의 반응은 중요하다. 나는 어떤 대답도 웬만하면 받아 주는 편이어서 "이상한 대답"이라고 살짝 핀잔을 주는 시늉을 하거나, 반복해서 장난을 치면 "마이너스"라고 경고를 준다. 그럼 또다시 한번, 학생들은 까르르 깔깔 뒤로 넘어간다.


내가 일하는 학교는 책상이 모둠 별로 나뉘어 있다. 교실 가운데 서면 사방에 4명씩 앉은 모둠이 4개다. 최대 16명. 나는 가운데 서서 학생들의 활동을 지켜보다가, 미션 수행을 어려워하면 가서 도와주고 미션 수행은 안 하고 각자 딴짓하고 있으면 미션을 상기시켜 주고 미션 수행이고 뭐고 신나게 노는 학생들은 주의를 준다. 사실 그럴 때 질문도 많이 나오고 학생과 교사 간 1:1 대화도 많이 이루어진다.


어느 날은 학생이 갑자기 훅 들어오며 물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 MBTI 맞춰 볼까요?


괜히 대답이 길어질까 봐 잠깐 망설이다가 "어... 그래요. 뭘까요?"라고 했더니, 서너 명의 학생들이 서로 말하려고 아우성이었다. J, F, P, S, N..... 이러다가 알파벳이란 알파벳은 다 나올 분위기. MBTI에 이렇게 진심이라니, 정말 너희들 한국 사람 다 됐구나. 속으로만 생각했다.


친구랑 홍대 맛집에 간 어느 날에는, 오랜만에 인스타에 맛집 태그를 걸어 파스타와 병맥주 사진을 올렸더니 학생에게서 바로 DM이 왔다.


선생님. 스트레스를 풀러 갔군요!?


후후. 이번엔 내가 키득키득 웃는다. 어우, 그래. 선생님도 병맥주 마시면서 스트레스도 풀고 그래야지. 금요일인데 말이야.


학생들과 나의 나이 차이가 이제 20년이다. 20대 초중반 학생들에게 나는 딱 그들의 엄마 나이다. 많이 양보해도 이모 나이쯤. 오늘 우리 반 막내 라인들에게 몇 년 생이냐고 물으니 05, 04년생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진짜 내 아이랑 서너 살 차이밖에 안 난다. 그러니 나는 무람없고 살갑게 다가오는 학생들이 너무 예쁘다. 어쩔 수 없이 대한민국 40대 후반 여성인 나는 적당히 아니 평균 이상으로 보수적이고, 그래서 살갑게 대해 주는 학생들이 참 좋다. 학생들과 그런 관계가 될 때 나는 교실 안에서 좀 더 진심이 되고 좀 더 자연스러워지고 좀 더 내 일이 좋아진다. 그리고 내 앞의 학생들이 내 아이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짓궂고 어리고 선한 존재라는 확신이 든다.


그리고 나는 내 몸에 딱 맞는 내 일을 찾은 느낌. 그래서 내 인생 또한 안정되고 안전한 느낌. 그런 느낌이 들고 그런 기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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