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선생님의 직업이 뭐예요?
이상한 질문이다. 학생들은 1초쯤 멍하니 있다가 키득키득 웃으면서 "선생님이요."라고 대답한다. 첫날이니까 선생님이 웃으라고 쉬운 문제를 내주나 보다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럼 나는 선생님의 직업은 당연히 한국어 선생님이지만 글도 쓴다. 선생님의 부캐는 작가다. 그런 말들을 하면서 내 책 사진도 보여 주고 북토크 사진도 보여 주고 내 책장 사진도 보여준다. 책이 어마어마하게 꽂혀 있는 내 책장 사진을. 그리고 교보문고에 가서 선생님 이름으로 검색하면 책이 두 권이나 뜬다고. 진짜라고. 작가 부심을 부리면서 첫날의 내 소개를 마무리한다. 책을 쓰고 나서부터, 항상 새 학기 아이스 브레이킹은 '작가'다. 내 두 번째 직업과 내 쓰는 삶에 대한 이야기들.
나는 요즘 이런 날들을 살고 있다.
내가 처음 작가가 꿈이라고 학생들에게 고백했을 때, 내 학생들은 마흔 넘은 선생님의 꿈을 열렬히 응원해 줬다. 그리고 누구는 영어판 번역을 누구는 스페인어판 번역을 해 주겠다고 했고, (본인이 말하기를) 머리는 나쁘지만 돈 많은 누구는 책을 많이 사주겠다고 했다. 학생들은 내 꿈이 곧 현실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태도로 나를 격려해 줬다. 누구에게도 내 꿈이 작가라고 말하지 않았던 때였다.
얼마 전 한 학생을 만났는데 내가 2급 때 만난 학생이었다. 나는 그 학생에게 반말과 존댓말을 가르쳤고 한국어의 시제-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가르쳤다. 아주 초급 한국어를 가르친 학생이다. 오랜만에 만난 그 학생이 나에게 오더니 아주 신난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님, 저 지금 5급이에요. 다시 만났으니까 책 주세요.
어느덧 1년의 시간이 지나, 내가 초급을 가르쳤던 학생을 다시 고급 반에서 만난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학생들을 처음 만날 때 하는 그 레퍼토리. "여러분, 5급에 오면 선생님 책을 선물로 줄게요." 그 말을 기억하고 다시 내게 나타난 것이다. 보통 그런 레퍼토리는 웃으라고 하는 말이고, 그럼 학생들은 선생님 말도 안 되는 소리 한다면서 웃으면서 마무리한다. 본인들은 고급은 안 가고 못 간다고. 보통 한국어 학습자들의 레벨 별 분포는 피라미드 형태여서, 초급은 아주 학생 수가 많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학생 수가 줄어든다. 한글을 배우는 학생 수가 10개 반이었다면 한국의 문학과 정치에 대해 공부하는 학생들은 2개 반 정도. 그런 규모다. 그래서 보통은 초급 학생들이 고급까지 지속할 확률은 높지 않고, 그래서 공수표를 날린 거였는데. 그런데 이렇게 내 눈앞에 나타나 내가 그때 한 말, 내 약속을 상기시키고 있는 거다.
나는 그날 10분 쉬는 시간에 연구실에 달려가서, 급하게 사인을 해서, 학생 손에 내 책을 안겨 주었다. 학생은 이거 이번에 나온 새 책 맞냐며 깨알 같이 챙길 건 다 챙기면서,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뭉클하다'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내가 더 뭉클하다고 속으로만 말했다.
여러분, 아는 한국 작가 누구 있어요?
며칠 전, 수업의 도입 질문은 이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한 모범 답안은 '한강'이었다. 이제 더 이상 학생들에게 한강은 치맥 하는 한강, 불꽃놀이 하는 한강, 자전거 타는 한강만이 아니다. 노벨 문학상을 탄 한국 문학계의 거장 '한'씨 성에 이름은 '강'인 그 한강 작가를 말할 거라 기대했다. 아니면 교과서를 예습하고 온 학생이라면 시인 김소월을 또는 수필가 피천득을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학생들은 배시시 웃으며 대번에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요...
아, 졌다. 나는 학생들을 이길 수 없다. 고급 한국어 학습자인 학생들은 이제 제법 한국 사람들이 쓰는 말을 써서 나를 웃게 한다. 어제도 뭔가 질문을 하는 나에게 한 학생이 "있어도 없어요." 이런 말을 해서 깜짝 놀라게 만들었고 "소확행"이 무엇의 약자인지 가르쳤을 때에는 몇몇의 학생들이 이마를 치며 뭔가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시원해했다.
나는 요즘 초심을 많이 잃는 중이었다. 괜히 글은 쓴다고 해가지고. 괜히 책은 낸다고 해가지고. 많은 행운을 잡았고 어마어마한 꿈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내고 북토크를 하고 여기저기 홍보를 하러 다니자니 자존감이 떨어지는 일이 종종 생겼다. 초보 작가인 나는 '초보'라는 단어에 걸맞게 많은 것이 미흡했고 실수도 많았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더 잘하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초보 작가의 책이 꽤 잘 팔리는 것을 알면서도 왜 더 안 팔릴까 그런 생각을 항상 했다.
그러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이었지만 교실에 가면 항상 내 학생들이 나를 이렇게나 반겨 주고 응원해 주고 기쁘게 해 준다. 요즘 쓰는 글이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에 대한 것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번 학기 학생들이 유난히 예쁘고 귀엽고 정이 간다. 나는 계속 나이를 먹을 것이고, 언젠가 완연하게 학생들의 부모님보다 나이가 많은 선생님이 될 것이다. 그럼 또 얼마나 더, 내 학생들이 귀여워질까. 자중을 좀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