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서둘러 기쁘게 집으로 온다. 다른 일을 제쳐두고 신데렐라처럼 촌각을 다투며 달리지는 않지만, 편안하고 당연한 마음으로 집에 온다.
비교적 퇴근이 빠른 나는, 퇴근 후 아이를 돌보기 전 약 1~2시간쯤 자유 시간이 있다. 물론 점심을 대충 때운다거나 건너뛴다면 조금 더 자유 시간이 길어질 수도 있고, 아이가 스스로 뭔갈 하게 미리 준비하고 계획을 세워둔다면 저녁 시간까지 연장할 수도 있다. 나는 항상 그 두어 시간이 (놀랍게도 매일매일 새록새록) 좋지만, 감당이 안 될 때도 더러 있다. 분명 자유 시간인데 알차게 보내야 할 것만 같고, 그렇다고 뭔갈 적극적으로 해 보기에는 좀 짧은 듯하고, 아무튼 약간 애매함을 느낀다. 물론 읽고 쓰는 게 좋은 나는, 침대 옆에 쌓여있는 책더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금세 충만해지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벚꽃이 흐드러진 날 운전대를 잡고 집으로 가는 건 약간 헛헛하다.
나에게 읽고 쓰기는 보고 싶은 지인과의 수다만큼의 효과가 있는 것 같다. 꼭 '보고 싶은' 지인이어야 한다. '그냥 지인'과의 만남에는 견줄 수 없다.
운전하면서 화장하면서 혼자 산책하면서 요리하면서, 쓰고 싶은 게 있으면 한 줄씩 기록해 놓는다.
그 후 시간이 될 때 그 제목들을하나씩 이야기로 풀어본다. 생각 외로 제목보다 더 많은 사연이 나에게서 나올 때도 있고, 막상 자리 잡고 쓰자니 딱 제목뿐인 글감이어서 다섯 줄을 못 넘기고 포기할 때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나의 이런 생각은 어떻게 쓰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그 책을 읽으면서 응원을 받았다.
이를테면 밥벌이의 현장에서 부당한 시스템에 부딪혔을 때, 그리고 그것에 이의를 제기할 능력이 없을 때, 그래서 그 무능이 모멸로 돌아왔을 때, 나는'이따 집에 가서 글을 쓰면 돼'라고 생각했다.
이미 세계에 공고하지만 납득하기는 어려운 권위들이 내게 순종을 요구할 때, 그를 따르지 않으면 내내 감내해야 할 고통이 더 많아질 때, 넙죽 고통을 받아 들지 못하는 비겁함이 또다시 모멸로 돌아왔을 때도
'이따 집에 가서 글을 쓰면 돼'라고 생각했다. 글을 쓴다고 실제로 뭐가 달라지는 건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겪은 일을 언어로 재현할 수 있다는 믿음은 희한하게도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것이 구체적인 세계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지 못해도, '쓸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내게 구체적인 힘이 되었다. 내 힘을 내가 안다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이따 집에 가서 글을 쓰면 되니까.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by 이윤주> 33쪽
블로그나 브런치에 글을 쓰면, 인스타나 페이스북에 글을 쓰면, 내 글이 읽히는 기쁨과 공감받는 기쁨도 얻을 수 있다. 물론 비공감 받는 슬픔도 덤으로 얻어진다.
하지만 인기 없는 글, 읽히지 않는 글에서도 나는 일종의 해방감을 느낀다. 읽히지 않으므로 공감받지도 못하지만 비공감 받을 위험도 없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