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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nes Apr 18. 2022

수다의 효과, 글쓰기의 효과

feat 이윤주 작가의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by 이윤주 작가


나는 요즘 서둘러 기쁘게 집으로 온다. 다른 일을 제쳐두고 신데렐라처럼 촌각을 다투며 달리지는 않지만, 편안하고 당연한 마음으로 집에 온다.


비교적 퇴근이 빠른 나는, 퇴근 후 아이를 돌보기 전 약 1~2시간쯤 자유 시간이 있다. 물론 점심을 대충 때운다거나 건너뛴다면 조금 더 자유 시간이 길어질 수도 있고, 아이가 스스로 뭔갈 하게 미리 준비하고 계획을 세워둔다면 저녁 시간까지 연장할 수도 있다. 나는 항상 그 두어 시간이 (놀랍게도 매일매일 새록새록) 좋지만, 감당이 안 될 때도 더러 있다. 분명 자유 시간인데 알차게 보내야 할 것만 같고, 그렇다고 뭔갈 적극적으로 해 보기에는 좀 짧은 듯하고, 아무튼 약간 애매함을 느낀다. 물론 읽고 쓰는 게 좋은 나는, 침대 옆에 쌓여있는 책더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금세 충만해지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벚꽃이 흐드러진 날 운전대를 잡고 집으로 가는 건 약간 헛헛하다.




나에게 읽고 쓰기는 보고 싶은 지인과의 수다만큼의 효과가 있는 것 같다. 꼭 '보고 싶은' 지인이어야 한다. '그냥 지인'과의 만남에는 견줄 수 없다.


운전하면서 화장하면서 혼자 산책하면서 요리하면서, 쓰고 싶은 게 있으면 한 줄씩 기록해 놓는다.

그 후 시간이 될 때 그 제목들을 하나씩 이야기로 풀어본다. 생각 외로 제목보다 더 많은 사연이 나에게서 나올 때도 있고, 막상 자리 잡고 쓰자니 딱 제목뿐인 글감이어서 다섯 줄을 못 넘기고 포기할 때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나의 이런 생각은 어떻게 쓰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그 책을 읽으면서 응원을 받았다.



이를테면 밥벌이의 현장에서 부당한 시스템에 부딪혔을 때, 그리고 그것에 이의를 제기할 능력이 없을 때, 그래서 그 무능이 모멸로 돌아왔을 때, 나는 '이따 집에 가서 글을 쓰면 돼'라고 생각했다.

이미 세계에 공고하지만 납득하기는 어려운 권위들이 내게 순종을 요구할 때, 그를 따르지 않으면 내내 감내해야 할 고통이 더 많아질 때, 넙죽 고통을 받아 들지 못하는 비겁함이 또다시 모멸로 돌아왔을 때도

'이따 집에 가서 글을 쓰면 돼'라고 생각했다. 글을 쓴다고 실제로 뭐가 달라지는 건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겪은 일을 언어로 재현할 수 있다는 믿음은 희한하게도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것이 구체적인 세계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지 못해도, '쓸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내게 구체적인 힘이 되었다. 내 힘을 내가 안다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이따 집에 가서 글을 쓰면 되니까.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by 이윤주> 33쪽



블로그나 브런치에 글을 쓰면, 인스타나 페이스북에 글을 쓰면, 내 글이 읽히는 기쁨과 공감받는 기쁨도 얻을 수 있다. 물론 비공감 받는 슬픔도 덤으로 얻어진다.

하지만 인기 없는 글, 읽히지 않는 글에서도 나는 일종의 해방감을 느낀다. 읽히지 않으므로 공감받지도 못하지만 비공감 받을 위험도 없기 때문에.


어쨌든, 어떻게 쓰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이윤주 작가님,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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