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교실, 시험 날 풍경

천태만상

by Agnes
니네 진짜 이상해.
너의 달콤한 남친은 사실 PC방을 더 가고 싶어 하지. 겁나 피곤하대
봄이 그렇게도 좋냐.


너의 달콤한 남친... 까지 읽고 단박에 알아버렸다. 이 친구, 10cm(권정렬)의 노래, 중에서도 '봄이 좋냐?' 팬이구나. 깨닫고 나서 시험지 여기저기를 보니 10cm의 노래 가사가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다. 권정렬 님 노래할 때 딕션이 뚜렷해 가사가 쏙쏙 귀에 꽂히기는 하지. 그래도 이건 좀... 그래도 이건 시험진데... 그래도 이건 좀... 생각하다가, 이 노래의 절정에서(봄이 그렇게도 좋냐 멍청이들아) '멍청이' 만 쏙 빼고 쓴 걸 보고 기특해 키득키득 웃어 버렸다. 차마 선생님께 '멍청이'를 읽게 하긴 좀 그랬나 보다. 찬찬히 살펴보니 그 외에도 이 가사 저 가사의 인상 깊었던 부분을 여기저기 받아 적었는지, '남사친' '여사친' '헤어진 그 친구' 등등 열아홉 한국어 학습자에게 인상 깊었을 가사들이 줄줄이 쌓여 있다.

#유형 1. 시험지 위에 자기가 쓰고 싶은 문장을 쓰는 자(者)다.


다음 시험지는 #유형 2. 번역하는 자다. 시험지 위에 빼곡하게 형광 핑크색으로, 모든 문자가 모국어로 번역돼 있다. 아직 머릿속에 양쪽 언어가 공존하는 친구다. 뭐든 번역해 모국어로 써 놓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 유형이다. 어휴. 쓰느라 팔목 꽤나 아팠겠다. 정말 팔목이 아팠는지, 시험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중간 쉬는 시간에 집에 가 버렸다. 그리고 시험지를 채점하다가 발견한 문구 "선생님, 미안해요. 너무 어려워요 ㅜㅜ" 마지막 우는 표정의 이모티콘이 제일 슬프다. 이모티콘은 텍스트에 표정을 실어 주는데, 이럴 때 정말 유용하다. 나는 학생의 마음이 느껴져 그동안 내가 무엇을 가르친 건가, 자괴감에 빠질 만도 한 시험 점수를 잊게 된다. 그리고 마냥 웃프다.


#유형 3. 이번엔 그리는 자다. 포켓몬이 등장했다. 제법 잘 그린다. 포켓몬 마니아인 내 아이에게 가져가서 보여주고 싶을 정도다. 나중에 시험지 확인할 때 도대체 왜 이렇게 시험지 여기저기에 그림을 그린 거냐고 물으니, 심심해서 그렸단다. 실제로 시험을 매우 잘 보는 학생이어서, 용서가 되었다. 역시 교사 사랑은 성적순인가. 신속하고 정확하게 문제를 푼 후 교사의 눈도 즐겁게 해 주는 자. 부끄럽지만 너무 예쁘다.


#유형 4. 빈 종이 파(派)다. 아무것도 안 쓰는 자. 가끔 등장하는데 진심으로 당황스럽다. 뭔가 열심히 보고 읽고 들었던 것 같은데 빈 종이를 낸 경우는 진심으로 당황스럽다. 객관식은 찍기라도 하는데 주관식은 모두 빈칸이다. 차라리 5분 만에 휘리릭 찍고 숙면을 취한 경우라면 또 다른 얘기인데 열심히 한 시간 동안 머리를 싸매더니 모든 주관식이 빈칸인 경우. 진심으로 막막하다. 열심히 문제를 풀려고 노력했던 것인가, 아니면 교사에게 예의를 다하기 위해 쓸 용기는 없지만 앉아 있었던 것인가. 이 경우가 제일 난감하다.


대학교 어학당은 1년 12개월이 4학기로 구성된다. 한 학기가 3개월씩 진행되고, 진도를 잘 따라온다면 가나다를 배우는 1급부터 82년생 김지영을 읽을 수도 있는 6급까지 배우는데 1년 반이 걸린다. 하지만 급 간 진급을 위해서는 몇 차례 시험을 봐야 하고,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해당 급을 다시 배워야 한다. 우리는 그걸 유급이라 부른다. 유급을 하면 한 번 배운 걸 다시 배우는 지루함과는 별개로 돈이 더 든다. 부족한 부분을 만회하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경우도 많지만, 비싼 등록금을 내고 똑같은 걸 또 배워야 하니까 억울해하는 경우도 많다. 내가 언급한 경우들은 이벤트 또는 에피소드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들이지만, 부정행위에 해당하는 난감한 에피소드들도 간혹 생긴다. 나라마다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부정행위를 바라보는 시각도, 부정행위에 대한 개념도 매우 다르다. 아무튼, 시험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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