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장
캔버스에 사물 (인물, 풍경, 정물 등)을 그리고, 가장자리나 모서리에 글 (서명, 제목, 날짜 등)을
적는다. 이를 통틀어서 '그림'이라고 한다. 그림에서 사물과 글은 서로 관계가 있을까, 아니면
각각 독립적인 요소일까?
사람들은 사물과 글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논하며 이 문제에 접근한다. 그들이 내리는 결론은,
사물은 존재의 영역에 속하고 글은 사유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둘 사이에 접점은 없으며,
그려진 사물과 적힌 글도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파이프를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놓고
그 옆에 "이것은 파이프다"라고 적은 그림이 있다고 했을 때, 이 그려진 파이프와 적힌 글이
서로 무관하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우선, 그려진 사물이 존재의 영역에 속한다는 생각은 비현실적이다. 유채물감으로 그려진
파이프가 도려낸 듯 캔버스에서 튀어나와 플라스틱, 약간의 철, 그리고 나무로 만들어진
'몸'으로 물화(物化)하여, 냄새나 연기 같은 물성(物性)을 뿜으며 우리 눈앞에 잠깐이라도
'존재'한다는 황당한 상상을 해야 한다. 그려진 사물은 시각, 즉 감각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작가가 아무 생각 없이 사물을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그려진 사물은 사유의
영역에도 속한다.
한편, 글은 사유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작가는 글을 적을 때 시각적인 측면도 분명
고려한다. 만일 그림 전체에 글이 시각적으로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다면 그는 서명마저도
생략한다. 시각적인 필요에 따라 날짜나 제목은 물론, 감상도 여러 줄 곁들인다. 아래는
글의 시각적인 효과가 쉽게 느껴지는 그림들이다.
그려진 사물과 적힌 글은 시각적이거나 사유적인 기능들을 다른 비중으로 나눠 행하며,
밀접하게__지시적이거나 설명적으로__관련되어 하나의 그림을 구성한다. 그리고 이렇게
구성된 그림이 비로소 존재성을 갖는다. 그림 속 사물과 글은 각각 존재와 사유의 영역에
순수하게 속하기 때문에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라, 그림이라는 하나의 존재에 속하는
요소들이기 때문에 긴밀한 관계에 있다.
<The Alto, Oil on Canvas, 76.5 x 61 cm, 2023>
<Moonlit Night (달밤), Oil on Wood Board, 72.7 x 60.6 cm,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