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그림 신념 12화

사물과 글__마그리트의 의도

12 장

by 채한리 Chae Hanlee

마그리트 (René Magritte, 1898-1967)는 <이미지의 배반>에서 파이프를 사실적으로

잘 그려놓고 그 아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었다. 그려진 사물은 분명 파이프인데,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왜 그랬을까?


마그리트는 글과 사물에 대한 철학자들의 견해에 공감하는 것 같다. 철학자들은 글과

사물에 대해 "'장님의 언어, 벙어리의 시각'처럼 서로 어긋난다"라고 하거나 "언어는 본질상

허구적이어서 실재에 닿지 못한다"라고 하며, 상호 간에 접점이 없다고 주장한다. 마그리트는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글을 파이프 위에 공간을 남겨 놓고 적었다.

글과 사물 간에 접점이 없다는 철학자들의 생각을 시각적으로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물론 파이프 위에 공간을 비워두고 "이것은 파이프다"라는 긍정문을 적었더라도 여전히

사물과 글 사이에 점점이 없는 것이 시각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미지의 배반>이 품고 있는

'배반'의 아이러니는 사라져 버린다.


아무튼 그려진 파이프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힌 글, 두 요소들만 봤을 때는

철학자들이 생각한 대로 서로 접점이 없다.


그러나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한다. 즉, '그림 전체'를 보면 그려진 파이프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힌 글은 <이미지의 배반>을 구성하는 시각적, 사유적 요소들로서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이 밀접한 관련 위에서, 그려진 파이프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힌 글은 함께 푸코 (Michel Foucault, 1926-1984)가 지적하는 마그리트의 의도__그림을

'확언'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의도__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파이프가 그럴듯하게 그려진 것을 보고 "참 잘 그린 파이프 그림이네!" 하고

경탄한다. 그런데 마그리트는 그것이 파이프가 아니라고 뒤틀어버렸다. "파이프 그림이네!"

하는 '확언'에 콧방귀를 뀐 격이다.


이것은 그림과 관련된 낡은 이념인 재현주의를 우회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마그리트의

의도를 연장해 보면 이런 입장에까지 이어진다: 구름처럼 그려놓고 작가가 제목을 '새'라고

적었을 때, 그림을 잘 못 그렸다고 하거나 제목이 틀렸다고 할 수 없다.


<이미지의 배반,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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