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장 Epilogue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 1929>를 보면, 적힌 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와 그려진 파이프
사이에 공간이 있다. 푸코는 이 공간이 글과 사물 사이의 '일종의 (본질) 전쟁' 지역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지역은 서로 싸우는 본질들이 거주하는 장소일 텐데, 사실은 '하나의 허공 혹은
공백'에 불과하다고 폭로한다. 푸코는 실증적 영역 너머에 본질들이 머무는 차원이 있다는
생각을 비웃었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본질들'은 유령의 땅에서 떠도는 유령 병사들이다.
책에는 '행간 (行間)'이라고 불리는 여백이 있다. 작가가 글로는 미처 전하지 못한 메시지를
그곳에서 찾을 수 있다는 듯, 사람들은 "행간을 읽으라'라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행간을
읽으려는 시도만으로도 독자는 의의의 수확을 거둘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림 감상도 마찬가지다. 보이는 것 외에 작가가 표현하지 못한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의도를 발견하기 위해 여백을 포함한 그림 전체를 자세히 살펴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런데 역시 놀랍게도 그렇게 할 때 감상자는 기대 이상의 흥미로운 체험을 할 수 있다.
독서나 그림 감상에 대한 이런 사고방식은 형이상학적이다. 보이는 것 이외의 본질과
실증할 수 있는 경계 너머의 영역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독서나 그림 감상의 목적은 과학적
탐구처럼 '근본적인 것'에 착륙하는 것이 아니다. 가능한 한 깊고 넓은 의미 지평에 닿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착륙이다. 형이상학은__비록 그것이 신비스럽기만 하고 믿을만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__독서와 그림 감상을 통해 깊고 넓은 이해에 닿은데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다른 분야에서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독서나 그림 감상에 관련해서만큼은 형이상학을
비웃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좋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을 끝맺는 지금, 하고 싶었던 말이 비로소 분명해졌다. 나는 이 책 전체를
통해서 그림 감상만이 아니라, 그림 그리는 것 자체가, 더 나아가 그림을 감싸고 있는 모든 것이
형이상학적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 책에 실린 글의 뼈대는 2021년 한국미술재단의 아트버스 카프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미술사랑>에 실린 12편의 소고(小考)들이다. 주제를 고쳐 잡고 애매했던
생각들을 좀 더 분명하게 하면서 전체적으로 다시 썼다.